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썸머 Aug 16. 2023

현실을 받아들여야하는 순간이라면...

Chapter 24.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대가를 주리라 믿어요. 퀸 학원을 졸업할 땐 미래가 곧은길처럼 제 앞에 뻗어 있는 것 같았어요. 그 길을 따라가면 중요한 이정표들을 수없이 만날 것 같았죠. 그런데 걷다 보니 길모퉁이에 이르렀어요. 모퉁이를 돌면 뭐가 있을지 모르지만,
전 가장 좋은 게 있다고 믿을래요. 길모퉁이에도 나름의 매력이 있어요, 아주머니. 모퉁이 너머 길이 어디로 향하는지 궁금하거든요.      
어떤 초록빛 영광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가 기다릴지, 어떤 새로운 풍경이 펼쳐질지, 어떤 새로운 아름다움과 마주칠지, 어떤 굽잇길과 언덕과 계곡들이 나타날지 말이에요."     
- 빨강머리앤 중     


우리가 앤을 사랑했던 이유는 그 어떤 인생의 역경과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과 상상력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꿋꿋함이었던 것 같다. 빨강머리앤의 후반부는 주인공 버프를 받아 승승장구하는 앤의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막판에 앤에게 큰 시련이 연달아 닥치게 된다. 실질적으로 농장을 이끌어갔던 매슈가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고, 전 재산을 예금하였던 에비 은행은 부도를 맞는다. 마릴라는 6개월 후 실명될 것이라는 의사의 진단까지 받았으니…. 레드몬드 대학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공부한다는 앞날 창창한 앤에게는 그야말로 벼락같은 일이 연달아 터졌다.     


마릴라는 마릴라대로 방도를 생각해두었다. 초록 지붕 집과 농장을 팔고, 그 돈으로 하숙을 할 생각이었다. 앤이 방학 때 돌아올 집은 없지만, 앤은 장학금을 받아 대학 학비는 걱정이 없었으니 말이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앤은 일주일 동안 이런저런 계획을 내놓았다. 앤은 그 무엇보다 초록 지붕 집과 마릴라가 가장 중요하다고 판단했고, 이를 위해 2년 동안 준비하였던 대학 입학과 장학금을 포기했다. 농장은 다이애나의 아버지에게 임대로 주는 것으로 해결했고, 앤은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교사가 되어 마릴라의 곁을 지켜주기로 한 것이다.     

앤이 대학을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길버트는 에이본리 학교의 교사 자리를 앤에게 양보하고, 본인은 멀리 떨어진 흰 모래마을 학교의 교사로 간다. 우연히 길버트를 만난 앤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두 사람은 최고의 친구가 되기로 약속한다. 비록 대학은 다니지 못했지만, 앤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한 명 더 얻게 되었다. 길버트와 앤은 대학 진학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았고, 함께 같은 곳을 바라보며 걸어가는 인생의 파트너가 된다.     


앤이 소설이 끝날 때 즈음 맞이한 상황은 그야말로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하지만 앤은 자신에게 닥친 현실을 덤덤하게 인정했다.  

   

초록 지붕 집을 포기하는 것보다 더 큰 희생은 없어요. 우리는 이 정든 공간을 지켜야 해요. 저는 결심했어요. 레드먼드 대학에 가지 않기로요.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서 지내며 교사로 일할 거예요.    


현실을 인정하면서도 앤은 가슴 속의 포부를 잊지 않았다.      


"저는 지금 어느 때보다도 포부에 넘치는걸요. 단지 그 대상을 바꿨을 뿐이에요. 전 좋은 선생님이 될 거랍니다. 마릴라 아주머니의 건강도 지켜드릴 거고요. 집에서 공부하면서 대학에서 배우는 과목들을 독학으로 익힐 거예요. 와, 정말 계획이 많아요. 일주일 동안, 이 생각만 했어요. 이곳에서 최선을 다해 살면 그에 따른 결과를 주리라 믿어요."

 

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이 매우 제한되었다. 하지만 그 길의 끝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하며 앤은 주어진 현실을 묵묵히 걸어갔다. 우리가 굽이굽이 따라 걸어가는 인생의 길은 푸르른 초원이 있을 때도 있고, 험난한 협곡이 펼쳐질 때도 있다. 사람에 따라 펼쳐지는 길이 다르니 뽑기 운이 중요한 것이 인생이지만, 일생토록 꽃길만 걷는 운 좋은 사람은 어차피 별로 없지 않은가.


몽고메리가 근무했던 학교 (L.M. Montgomery Lower Bedeque School)


회복 탄력성이 약한 사람은 똑같이 힘든 일을 겪어도 상처 때문에 사람을 불신하고 비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확대해석한다. 마치 절망의 구렁텅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는 앤의 표현처럼 말이다. 나 역시 문제가 닥칠 때마다 가정에 휩쓸린 나머지 사실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행동하지 못했다. 시련을 겪을 때마다 ‘왜 세상은 나에게 이런 시련을 주는 것일까?’ 절규했다. 회복하는 능력이 너무 낮았기 때문에 다시 일상에 복귀하는데 많은 시간이 필요했고, 과도하게 많은 에너지와 감정, 시간을 낭비하기 일쑤였다.     


나는 몇 년에 걸쳐 내면의 트라우마와 부정적인 메시지를 지우는 작업을 하였고, 남편은 그런 내게 본인 나름대로 최선의 안전기지 역할을 하려 노력해주었다. 이 과정은 나에게 뜻하지 않은 회복 탄력성을 선물해주었다. 이제 힘든 일이 있어도 나는 그 사건을 확대해석하지 않는다. 살다 보면 중도 보고 소도 본다는 말이 있지. 살다 보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지나고 보면 힘들었던 시간도 그 나름대로 도움이 되었어라고 긍정적인 면도 볼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오랫동안 어떻게 하면 문제를 안 만들까 고민했다. 온전히 신을 영접하면 순탄하게 산다고 하여 나의 뜻이 아닌 신의 뜻대로만 살려고 고군분투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하고 요리조리 애써보아도 그 어떤 치밀한 계획을 세워놓아도 예기치 못한 불행이나 가거늘 완전히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내가 배워야 했던 건 완벽한 상황과 현실을 만드는 법이 아니라, 유연한 사고와 회복 탄력성을 키워 주어진 환경을 더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긍정적으로 공존하는 법이었다.     


문제가 닥쳤을 때는 기지를 발휘해보자. 스스로 초라하게 느껴질 때는 멋진 내 모습을 상상을 해보자. 절망에 빠졌을 때는 새로운 희망을 기대하며 현실을 걸어가자.     


나는 가난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충분한 정서적/경제적 돌봄을 받지 못하고 성장하였다. 가정에서 일어나는 정서적 학대의 생존자로 자신의 경험을 나누고 있다. 못생기고 감정 조절이 미숙하지만 배우고 성장하는 소설 <빨강머리앤>의 주인공을 보며, 어린시절에는 삶에 대한 의지를 다지곤 했었다.     


핑크빛 드레스를 입고 왕관을 쓴 공주님들에게는 감정 이입을 하지 못했던 여자 아이가 있었다. 못생긴 외모와 모난 성격의 자신을 공주라고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TV에서 애니메이션 <빨강머리앤>을 보고, 앤에게 푹 빠져버렸다. 또래와는 다른 성장배경과 외모로 인해 힘들어하는 주인공에게 깊이 공감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는 앤을 보며 삶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그런 저자의 오랜 꿈은 <빨강머리앤>의 배경인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 방문하는 것이었다. 이룰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 꿈은 우연한 계기로 이루어졌다. 섬 곳곳을 누비며 <빨강머리앤> 속 이야기를 떠올렸고, 힘들었던 유년 시절과 앤의 이야기가 어떻게 자신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었는지를 이야기로 엮었다. 

    

유년 시절 외롭고 상처받은 저자가 소설 <빨강머리앤>의 명소를 방문하며, 자신의 유년 시절을 만난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가진 독자들에게 공감을 주고 싶다.


소설 <빨강머리앤>의 마지막 문장으로 마친다. 


"하느님은 하늘에 계시고 세상은 평안하여라. (God's in his heaven all's right with the world)" - 로버트 브라우닝의 <피파가 지나간다> 중.     








Q. 힘들었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던 현실이 있나요?




앤의 따뜻한 말이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이전 24화 때로는 실수가 축복이 되기도 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