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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썸머 Aug 15. 2023

때로는 실수가 축복이 되기도 한다

Chapter 23. 앤, 너는 내 딸이란다


매슈는 눈가가 촉촉해지는 느낌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푸른 여름밤을 수놓은 별빛 아래서 그는 격양된 걸음으로 마당을 가로질러 미루나무 옆으로 난 울타리 문까지 걸어갔다. 매슈는 자랑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그래, 앤이 버릇없는 아이로 자란 것 같진 않아. 가끔 내가 간섭한 것도 그리 나쁘지 않았던 게야. 저 아이는 똑똑하고 예쁜 데다 다정하기도 하고, 그게 무엇보다 좋은 점이지. 저 애는 우리에게 축복이었어. 스펜스 부인이 저지른 실수보다 더 운 좋은 실수는 없을 거야. 그걸 운이라고 한다면 말이지. 하지만 그건 운이라고 할 수 없어. 하늘의 뜻이었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그 애가 필요하단 걸 아신 거야.“     
<빨강머리앤> 중  

   

매슈 아저씨는 부끄러움을 많이 타고 말수가 적었고, 마을 사람들로부터 이상하다거나 독특하다는 평을 받는 인물이었다. 외모까지 특이하다 보니 여성들이 자신을 비웃는 것 같아 여성들과는 대화도 제대로 못 했다. 마을에서도 사람들과 가능한 제일 멀리 떨어진 초록 지붕 집에서 감자 농사를 짓기 때문에, 매슈는 사람들과 어울릴 필요 없이 자신만의 일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런 설정 탓에 소설에서 매슈의 대사란 린드 부인보다도 적었고, 등장 분량은 다이애나보다도 훨씬 적었다. 초록 지붕 집에서 배경처럼 식탁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말없이 소파에 누워 신문을 읽는 장면을 모두 포함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성격의 매슈지만 그는 고요한 자신의 삶에 끼어들어 좌충우돌 사건을 만들어내는 앤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앤은 매슈의 좁디좁은 세상을 조금씩 밖으로 열어준 존재이기도 하다. 앤 덕분에 매슈는 조금씩 사회 속에서 어울리는 시도를 해보기도 한다. 과도하게 말이 많았던 열 한 살 앤과 과도하게 말이 없었던 예순 살 매슈는 서로의 부족한 점을 보완해주는 좋은 친구가 되었다. 매슈는 소설 안에서 앤 만큼이나 놀라운 성장을 보여준 인물이기도 하다. 비록 적은 분량의 대사이지만 그의 말에는 힘이 있어 소설의 후반부에는 울림을 주는 묵직한 메시지를 전하기도 한다.     

 

초록 지붕 집의 매슈와 마릴라는 매슈의 농장일을 도와줄 남자아이를 원했다. 하지만 스펜서 부인의 실수로 남자아이 대신 깡마른 여자아이가 초록 지붕 집으로 오게 되었다. 하지만 그 실수는 두 남매에게 '축복'이 되었다. 마음이 따뜻하고 똑똑한 앤은 두 남매가 부모로서의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고, 매슈가 떠난 초록 지붕 집에 큰 힘이 되어주기도 한다.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농장일을 하는 매슈를 보며 마음이 무거워진 앤은 이렇게 말한다.

     

”제가 아저씨가 바라던 남자아이였다면 지금쯤 아저씨께 많은 도움이 되었겠죠. 여러 가지로 짐을 덜어드렸을 테고요. 그 생각만 하면 제가 남자아이였다면 좋았을 걸 싶어요.“     
”글쎄다. 남자아이 열두 명을 준대도 너와 바꾸지 않을 거야, 앤. 잊지 마라. 남자아이 열둘보다 네가 나아. 에이본리 장학생이 남자아이는 아니었지, 아마? 여자아이였는데, 우리 딸, 자랑스러운 내 딸 말이다.“     


나는 아직도 이 구절을 읽으면 눈물이 난다. 울컥해서 소리 내 읽기 어려울 때가 많다. 몇 번을 읽어도 그렇다. 아마 내가 평생 듣고 싶었던 말이었던 것 같다. 축복받고 환영받고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살아온 지난 모진 세월은 이 한마디, 진정한 인정을 받기 위해서였기 때문인 것 같다. 실수 같은 나의 존재가 누군가에게 큰 행운과 축복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며 살아왔다.     


초록지붕집 유적지(Green Gables Heritage Place) 1층에는 매슈의 방이 있다. 먼 거리를 가거나 손님이 올 때만 입는 흰 카라가 달린 좋은 옷 한 벌이 놓여있다


미국 드라마 <내가 그녀를 만났을 때(How I met your mother)>를 보다가 대디 이슈(Daddy issue)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극 중 바람둥이인 바니가 ‘대디 이슈’가 있는 여성에게 접근한다는 이야기였다. 나는 그 단어의 뜻을 찾아보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리적으로 아버지가 존재했어도 의지가 되어주지 않았거나 학대하거나 방임했다면 그 딸이 가지게 되는 콤플렉스를 의미했다.      


무의식적으로 나는 아버지로부터 받지 못했던 정서적인 돌봄을 남편으로부터 받기를 기대하고 결혼했다. 하지만 내 기대가 과도한 것인지, 혹은 잘못된 상대를 선택했는지 우리 부부는 늘 삐거덕거렸다. 나는 서운했고, 남편은 버거워했다. 내 인생의 결핍이 무엇인지 그리고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그저 도망치듯 결혼한 결과였다. 나에게 대디 이슈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면, 정서적인 교감과 지지를 결혼의 우선순위로 두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의 신앙심과 그가 만들어낸 성취들을 쫓아 결혼하고 말았다.  

   

농장일을 도와줄 남자아이가 필요한 초록 지붕 집에 왜 깡마르고 말 많고 툭하면 울고 마는 여자아이 앤이 온 것처럼. 실수처럼 무뚝뚝한 남편이 내 인생에 들어왔다. 하지만 앤이 불쌍해서 받아들여 준 마릴라와 매슈의 삶이 앤으로 인해 도리어 풍성해지고 행복해졌던 것처럼, 모든 실수가 꼭 불행으로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한번은 남편이 동료와 있는데 내가 전화를 한 일이 있다. <010-XXXX-XXXX, 이@@>이라는 발신 정보가 떴고, 남편은 나와 짧은 통화를 했다. 이 광경을 동료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보더란다. 왜 놀래지? 의아해하는 남편에게 직장 동료는 ‘우리 와이프 이름도 이@@인데 이름이 같아서 너무 놀랐네’라고 말했다.      


퇴근한 남편은 흔한 내 이름으로 생긴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나는 이상했다. 내 이름은 <85년생 김지영> 속 김지영만큼이나 흔한 이름이라, 이름이 같은 사람을 만난다고 해도 놀랄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의아하던 나는 동료가 놀랐던 이유를 생각해냈다. 신혼인데 와이프 핸드폰 번호를 ‘이@@’으로 저장해놓은 것에 놀란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남편은 매우 당황해하면서 핸드폰에 저장된 내 이름을 황급히 바꾸었다. ‘내 사랑♥’이라나 뭐라나.     


왜? 그 동료분이랑 둘이 있을 때, 또 전화해줘? 바꿨다고 보여줘야 좋은 남편으로 보이지? 하하. 

    

그날도 웃음으로 승화시켰다. 우리 부부는 우리의 만남을 ‘실수’라며 자책하는 것이 아니라, ‘축복’이었다며 감사할 수 있도록 더 많이 노력하고 부족한 점을 채워나가며 성장하는 중이다.     







Q. 실수라고 생각했던 사건이 나중에 더 잘된 일이 되었던 경험이 있나요?




앤의 따뜻한 한 마디가 필요하다면?

https://www.ciderhealing.com/test/anne-affi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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