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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꿈에서본시인 Jun 15. 2024

오늘을 살았던: 6월

오늘도 이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1.

발바닥이 무심결에 가렵다고 느끼고 나서야 나는 모기에 물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늘 상 한 발 놓쳐서 눈앞에서 닫혀버린 지하철 플랫폼 속 스크린도어를 마주한 허무함으로 예민하게 반응하지 못한 스스로의 감각에 대해 후회를 해보지만 수면상태의 나는 내가 컨트롤할 수 있는 상태의 내가 아니었다. 


이렇게 또 여름이 찾아왔음을 몸소 느낀다. 모기 덕분에 계절의 시작을 깨닫게 된 것은 아니었지만 이렇게나마 그 결과의 이유를 찾고자 함은 어디에도 하소연할 길 없는 가려운 증상에 대한 반증일 테다. 그에 반해 명확하게도 두 달도 채 되지 않은 새로운 직장에서의 지난 시간은 너무도 빨리 지나갔다. 시간을 파헤치고 세세하게 들어차있는 새로운 과정들과 낯선 사람들은 조금의 틈도 어색하지 않으려는 듯 빼곡하게 들어차있어 조금의 쉼도 허락하지 않으려 했다. 나도 그에 상응하듯 여유 있는 내가 돌아설 길 없는 골목에 갇힌 미아처럼 발을 동동 거리며 흥분하기에 마음만 앞섰다. 이렇게 또 적응을 해간다. 낯설기 그지없던 공간과 시간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몸으로 기억하고 생각으로 이해하고 있다. 추가적인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평일과 주말이라는 경계가 모호하게 내 사고를 지배하고 있지만, 나는 애써 외면하려 토요일의 새벽에 선잠에서 각성한 몽롱한 상태로 타자를 치면서 그 나름의 의미를 찾으려 했다. 옆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이 새근새근 잠들어있고, 평온하기 그지없는 이 시간에 나는 내가 무엇인지 왜 지금 살아가고 있는지 걷던 길에 발을 헛디디기에 충분한 보도블록처럼 급작스런 당혹감을 내비친다. 


2.

요시모토 바나나의 에세이를 읽고 있다. 그녀의 작품이 그렇게 두드러졌었나 기억을 되새겨야 할 정도로 놀라운 영감을 주고 있다. 소설 속의 작가인 그녀는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엉겁결에 집어든 도서관에서의 선택은 이렇게 때로는 놀라운 길로 나를 인도했다. '그날의 선택이 지금의 나'라는 드라마틱한 광고 문구가 이처럼 딱 맞게 떨어지는 상황을 묘사할 길이 없다. 영원한 것 없다는 초월적인 생각이 나는 문득 떠올랐다. 아등바등하고 있는 나의 현실을 갑자기 붕 떠오른 비행기에서 내려다본 나를 상상하며 깨알보다 작아진 나의 존재로 치환해 본다. (그래서 이륙해 버린 기내에서의 감각은 늘 내게 뭔가 철학적인 순간을 던진다) 그 티끌만 한 존재가(내가) 스스로를 잡아먹지 못해,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답답해하고 못마땅해하며 신세를 한탄한다. 애처로운 내가 그렇게 객관화되어 자신을 초월해 제삼자의 누군가가 된다. 나는 그런 순간이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초록색 사람이 점등하고 스크램블 교차로에 사람들이 얼기설기 자신의 방향을 향해 스쳐지다가는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이게 뭐라고 나는 뭘 그렇게 마음을 쏟고 있는가. 나는 언제든 죽음이라는 존재의 의미가 사라져도 이상할 길이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죽음의 의미를 생각하고 있지만 그것이 부정된 현실에서 마냥 쉽게 꺼낼 수 없는 주제가 늘 나를 자극한다. 사람들은 각자 가지고 있는 삶의 무게를 이겨내고 있기에 누구도 쉽게 타인의 시간을 측정할 길이 없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관성 탓에 누군가를 비난하고 내 잣대에 빗대어 스스럼없이 평가하게 된다. 요시모토는 그런 나에게 무언가를 말하고자 했고, 나는 그 얘기를 귀담아 들었다.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일. 그것은 삶을 살아가는 것도 있지만 죽음을 마주하는 것도 있다. 답을 찾은 것 같던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나는 깨달은 찰나는 갑자기 떠오른 영감처럼 순간 날려버렸다. 기억에 남은 흔적은 그 생각이 잠시 머물렀다는 아주 찰나의 찌꺼기만 남겼을 뿐 그 존재의 원형은 온데간데없었다.


3.

이틀 전에 이탈리안 식당에 갔다 와서 호되게 고생을 했다. 그날은 외부 강연을 들으러 참석한 탓에 직장동료와 외부에서 점심을 먹어야 했다. 평소에는 도시락을 싸고 다녀서 끼니를 뭘로 챙길까 하는 질문을 미리 하지 않아도 되었지만, 그날은 동료가 있어 불필요한 생각을 소비하게 되었다. 이것도 업무의 일환인가 하는 생각에 여러 가지 시킨 세트 메뉴 앞에서 (결과적으로 세트를 시킨 것은 잘못된 선택이었다) 배고픈 상태의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오직 입으로 접시 위에 올려진 물체들을 넣기 급급했다. (그들은 나를 식탐이 넘치는 사람이라 오해했을 것이다) 

허기를 진 감각을 느낀다면 나는 이미 위험했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도 모르겠지만, 나는 끼니를 놓치면 꽤 위급한 상황이다. (저혈압에 가까운 나의 건강 상태를 의심하게 되지만 분명한 근거는 되지 못했다) 배고픈 상태에서의 식사는 결국 급체를 하는 느낌이라 착각한 세월이 길었다. 결과적으로 속이 안 좋은 상태가 엄청난 두통을 동반하고 몸에 위급한 상황이 일어나고 있음을 경고하는데, 그것은 내가 감당하기 버거운 알림이었다. 장염에 걸리면 초기 증상이 비슷한 느낌인데, 그렇다고 잘못된 음식을 먹은 것도 아니다. 적어도 내 앞의 두 명의 동료는 멀쩡했다. 생선과, 달걀은 먹는다는 비건을 주장하고 나서부터는 치즈를 의심했다. 유제품을 피하고는 있지만 피자를 외면할 수 없었던 나는 사교의 이유로 메뉴의 재료에게 넓은 아량을 베풀었다. 그게 실수였을까. 강연장의 쌀쌀한 냉기가 그날의 컨디션을 더욱 악화시켰는지도 모른다. 나는 수족냉증의 후계자이니까 여름에도 쌀쌀한 공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집에 와서 거의 인간이 아닌 상태가 조금 지속되었다. 그날의 짧은 옷차림과, 음식에 섞여 들어있던 치즈, 그리고 허기짐을 메꾸지 못한 순간이 애석하고 원망스러웠지만 무엇을 짐작해 보았자 그 고통을 해결해 주는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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