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때도 있습니다.
바쁜 일상을 보내고 한 꺼풀 걷어낸 휴식으로 시작된 주말이 왔다. 한쪽으로 쏠린 자아를 겨우 부여잡고 내가 나를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넘쳐 흘렸다. 생각만으로도 우습게 보이는 어이없는 일을 저질러 보기도 싶고, 평소에는 시도하지 않은 뻔하지 않는 선택을 해보고 싶은 그런 날. 나는 스타벅스에서 퍼스널 커스텀이 가능하다는 선택지에서 두 번만 넣어야 하는 녹차가루를 7번까지 끌어올린 녹차라테를 시키며 주체할 수 없는 이상함을 표출했다. (이것은 커피 브랜드가 기대하지 않은 새로운 실험이다) 제공된 머그잔에는 뜨거운 두유온도에도 차마 풀어지지 못한 녹차가루 덩어리가 진득거리는 녹색 액체가 되어 나를 마주했다. 나는 짙은 녹조가 그을진 음료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쓴맛을 넘어 벌칙을 받는 듯한 스스로의 선택에 잠시 후회를 했으나 이것도 오늘을 사는 나의 모습이라며 한숨 섞인 호탕함으로 나를 마주했다.
"사고 싶은 게 없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소비가 미덕인 상황 가운데 나는 불경한 마음을 품었다. 녹색액체를 한 모금씩 열두 차례에 나누어 마셨던 기분이 내게 이상한 느낌을 주었기 때문은 아니다. 이미 나는 카페 맞은편의 백화점을 둘러보며 평소에 구경삼아 잘 가던 브랜드를 눈으로 좇으며 이리저리 매장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사고 싶은 물건이 없었다. 멋들어진 디스플레이와 매장의 환경을 매력적인 소품과 갖은 장치로 미래에 부족할 나의 모습에 아름다운 환상을 주었다. 하지만 조금도 매력적이지 않았다. 아니, 이미 나는 충분히 가지고 있어서 좁은 집에 또 다른 물건을 들여야 하는 스트레스가 더 커 보였다. 심지어 나는 현재 가진 물건을 대체할 조건으로 선택지를 늘려보았음에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게다가 시즌 오프한다는 놀라운 숫자를 붙인 가격표를 바라봤음에도 불구하고 손이 가지 않았다. 결론은 내게는 물건이 필요가 없었다.
새로운 시즌을 맞아 새롭게 걸린 옷들을 바라보며, 아프리카를 넘어 남미의 자연환경에 쌓여서 환경폐기물이 되어버린 옷더미들이 자연스레 떠올라 소비를 향하려던 나의 행동은 발목이 잡힌다. 리사이클된 소재와, 페트병을 가공해 친환경적이라는 브랜드의 농락에 쉽게 넘어가지 않더라도 옷을 사지 않는 것 자체가 친환경이라는 사실을 앎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소비는 장려된다. 조금이라도 소비자의 죄책감을 덜어내려 많은 기업들이 녹색 마케팅을 벌리지만 그린워싱으로 표명되는 어떠한 소비도 환경을 위한다는 면죄부가 될 수 없음에도 소비는 그 자체로 고귀하고 명료한 행위이다.
그렇다면 사고 싶은 게 없다는 나의 순수한 생각은 환경을 위한다는 근사한 철학에 빗대어 올바른 것일까? 삶의 목적을 잃어버린 상황에 나는 당혹감을 느낀다. 늘 잘 살고 있다고, 현실을 즐기며 삶의 충만함을 스스로 드러내는 SNS 앞에서 치덕치덕 발려진 교묘한 광고를 나는 외면하기 쉽지 않다. 심지어 일로 써도 미래의 고객들의 지갑을 열기 위한 행동에 가담하고 있는 나조차도 누군가의 기획된 술수를 가려내려 하지 않는다. 사람들의 삶이 서로가 제공하고 있는 트릭에 속고 아닌 척 속아주는 열린 장이 되어버린 것 같은 상황에 어떤 모습으로 오늘을 살아가야 하는지 고민하고 있는 나를 바라본다. 부족함을 채우라는 끊임없는 외침에 차마 외면으로 애써 차분한 척해보아도 어느새 손길과 눈길이 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다. 차라리 이상한 사람이 되어서 어디에도 측정할 길이 없는 분포 속에 들어가 기업이 타깃으로 삼지 않는 영역에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다.
오늘은 사고 싶은 게 없고, 이상한 녹색액체를 다 마셨고 나머지 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걸로 충분히 나와 조우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