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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정도 Jun 03. 2023

경계선에서

난 지금 경계선에 서 있다. 내 삶의 가장 큰 두 축, 결혼과 직장 모두 그 끝을 앞두고 있다. 이번 달에는 직장이, 다음 달에는 결혼이 끝난다. 각각 끝나는 날이 정해져 있으니 끝날 예정이지만 사직서와 이혼신청서에 서명하고 제출한 순간 이미 끝나버린 것이다. 아니, 끝낸 것이다.



왜 나는 결혼과 직장을 한 방에 날려 보내는가? 과거의 나처럼 시차를 두고 저울질하며 한 발씩 신중하게 갔어도 될 일 아닌가? 최소한 직장이라도 계속 다니면서 삶의 루틴을 이어 나가는 것이 조금은 균형 잡힌 게 아닌가? 그럴지도 모른다. 그런데 난 지금 균형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 내가 원하는 건 완전한 추락이다.



돌이킬 수 없는 지점까지, 과거에 조금이라도 미련 가질 힘조차 없는 곳까지 떨어지는 것, 그래서 과거의 삶에 빗장 걸어 잠그는 것, 결혼이나 직장과 같은 제도 편입으로부터 탈주하는 것, 그래서 사회에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자, 다수자도 주변인도 아닌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내 의도다. 일종의 흥미로운 실험이기도 하다.



나는 다수자로 계속 살아가기엔 너무 많이 알아버렸고, 주변인이 되기엔 너무 많이 가졌다. 다수자로 살려면 정신병자가 될 것이고, 주변인으로 살려면 거짓말쟁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다수자의 길은 나를 기만하는 것이고 주변인의 길은 남을 기만하는 것이며 각각의 대가는 혹독하다. 내 길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경계인의 길을 선택하고 말고 할 게 아니라 이 길이 날 선택한 걸지도 모른다.



경계인의 길이 무엇인지 알 턱없다. 짐작 건데 사회의 시선에선 유령과 같을 것이다. 어쩌면 문제아나 이단, 최소한 누구에게나 불편한 존재 같은 것이겠지. 회사 사람들이 서울불꽃축제를 보고 얼마나 예쁘고 멋졌는지와 같은, 누구에게나 쉬이 받아들여질 만한, 그래서 아무것도 아닌 감상을 자랑스레 늘어놓을 때, 나는 우크라이나의 포 소리를 듣는 것 같아 끔찍했다고 말했을 때처럼. (다시 생각해도 그날 회의실의 어색한 기류는 참으로 통쾌했다.)



또 다른 결혼을 바라지 않는 이혼과 또 다른 입사를 바라지 않는 퇴사의 장점은 단 하나다. 이제 그 누구의 눈치도 볼 일이 없다. 나는 나에게, 오직 내게만 선을 행할 것이다. 착함도 친절함도 아닌 것, 이기적이기도 악하기도 한 것, 타고난 본성대로 사는 것, 본성의 역량에 만족하고, 본성으로 오직 본성으로만 존재하는 것, 내 본성에만 충실한 것, 때론 인간으로 하지만 대부분 짐승으로 오늘만 사는 것, 그것이 자연이다. 그것이 선이다.



이것이 누군가에겐 불편함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겐 폭력으로 다다를 것이다. 나는 이해받지 못할 것이며 사랑받지 못할 것이다. 상관없다. 내가 나를 이해할 것이고 내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 자신에게 진실되기만 하다면, 스스로 부끄럽지만 않다면, 나는 나 아닌 누군가에게, 얼굴 없는 이들에게 이해받거나 사랑받는 것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그것이 나의 선이다.



곧 해 떨어질 시간이다. 이제 이 글은 집어치우고 남은 오늘을 살러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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