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써야 사는 사람이다. 노트건 노트북이건 상관없다. 쓰지 않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이젠 몸이 아파온다. 예전엔 쓰지 않고도 몇 달은 거뜬히 버틸 수 있었다. 그만큼 해야 할 일이나 관심을 끄는 것이 많았다. 그런데 지금은 하루를 넘기기 힘들다. 이젠 해야 할 일이 없을뿐더러 세상 돌아가는 일에도 관심이 없다. 남아도는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내 관심을 끄는 건 문장이 되어주길 기다리다 포기하고 돌아서는 생각의 조각들, 그걸 놓칠 새라 수시로 끄적이는 글, 오래전 또는 여러번 죽었던 이들의 책 몇 권뿐이다. TV는 원래 보지도 않았지만, 유튜브에서 그나마 챙겨봤던 것들이 더 이상 재밌지도 않다. 대부분 허접 쓰레기 같으니까.
디아블로 4가 나왔다길래 궁금해서 백만 년 만에 피시방에 갔다. 옛날처럼 만원에 24시간을 충전하고 오랜 기간 방치해서 비활성화된 블리자드 계정도 복구하는 등 나름의 노력을 했지만 결국 한 시간도 못 채우고 나와버렸다. 이미 허구로 가득 찬 삶에서 또 다른 허구를, 그것도 감동이랄 게 전혀 없는 걸 한 시간 동안 꾸역꾸역 하고 있자니 화가 났다.
"지금 화나셨죠?" 대뜸 바텐더가 물었다.
"화나보여서요. 그래도 괜찮아요. 화 많이 내세요."
난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내 속내를 들켜버린 걸까? 날 처음 보는 대부분의 이들이 무섭다고 말하는 내 인상에 대한 서술처럼, 난 화난 것처럼 보이는 걸까? 난 화난 걸까? 그는 주얼리샵을 열개 넘게 운영했던 과거의 영광 스토리를 한동안 이어갔고, 결국엔 뻔하게도, 그때 다 팔고 돈 왕창 벌어놨어야 했다고, 자랑인지 회한인지 모를 표정으로 말했다. 왕창 벌었어야 했다는 돈이 10억이라는 소릴 듣고, 그래도 이 아저씨는 회사 사람들에 비하면 소박하기까지 해 오히려 그에게서 나름의 인간미가 느껴질 정도였다.
인간미. 내가 그리워하는 무엇. 감동의 순간. 내가 죽을 때까지 포기할 수 없는 무엇. 감동할 대상을 찾는 건 고된 일이고, 조금이라도 감동할 게 있다면 행복한 거고, 하지만 감동은 신논현역 같은 곳에는 없는 것이고. 모두가 같은 얼굴로, 같은 목소리로, 그들 몸과 몸 사이 촘촘하게 걸쳐있는 규칙과 관습 안에서 감동할 거리를 찾는 건 어불성설이고. 또다시 잡스러운 글이 될 것 같지만 작자가 잡스럽기 때문에 그건 또 어쩔 수 없고.
헛소리도 계속하다 보면 좀 나은 헛소리가 되려나. 글에도 여러 종류가 있지만 그중 제일 재밌는 건 일기다. 부코스키가 죽기 전 몇 년간의 일기를 엮은 책이 있는데 반쯤 취한 목소리, 모니터에 튀는 침, 갖은 욕설과 저주, 경마에 대한 매혹, 글, 멈출 수 없는 쓰기 욕망, 벽과 나무 기둥에 밴 담배 냄새, 굴러다니는 잔과 술병들, 그 안에 조금 남은 위스키 냄새, 간밤의 여자 냄새, 그 모두가 진동하는 공간이자 곧 그의 내면세계에 빨려들어와 있는 착각이 든다. 그나저나 이 책은 그에 걸맞게 속지를 색바랜 갱지로 썼어야 했다. 출판인들은 모험 정신이 없어도 너무 없다.
글과 기억이 편집 작용이란 걸 반박할 근거는 지난 몇 달간 찾을 수 없었고, 그래서 글과 기억이 대상으로 삼는 내용과 그 이면의 배경은 과도하게 감춰지거나 부풀려진다. 일기도 글이고 많은 부분 기억에 의존하고 있으니까 이를 벗어날 순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왜 부코스키의 일기엔 온갖 냄새가 진동하는 걸까? 하긴 영화 <Biutiful>에서도 하늘을 뱅뱅 도는 까마귀 떼 울음소리, 검은 바다, 죽음의 냄새가 가득하니까 어쩌면 그의 일기도 예술의 기능을 하고 있는 거다. 아님 말고. 이렇게 헛소리 한 단락이 추가됐다.
예전에 불현듯 나는 글을 신뢰하는가, 충분히 신뢰하는가라는 물음이 생겼고, 그렇지 못하다,라는 게 지금의 답이다. 왜?
브런치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 젊은 작가들의 글은 도무지 읽히지가 않는데, 그 이유는 다들 예쁘기만 해서 그렇다. 예쁜 글, 예쁘기만 한 글. 그 이상 할 말은 없는 게 나도 멋지기만 한 글에 천착해왔으니까. 예쁘기만 하고 멋지기만 한 글. 얻을 거라곤 분칠 냄새만 있는 글. 포장을 뜯어냈더니 또 다른 포장으로 둘러있고 그다음에는 포장과 포장이. 대체 알맹이는 어딨는 거야? 네 세계는 어딨는 거야? 허접 쓰레기 같은 글. 어쨌거나 이 글도 마찬가지.
베케트의 말이 큰 위안이 되는 건 어쩔 수 없다.
"시도했고, 실패했다. 상관없다. 다시 하기. 다시 실패하기. 더 잘 실패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