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5학년이었나. 여름이 가까워 무더워진 봄에 우리 가족과 아버지 친구들 여럿이서 등산을 갔다. 하산길은 화강암이 잘게 쪼개져 거친 돌길 아래로 급하게 이어졌고 난 발을 헛디뎌 앞으로 미끄러져 굴렀다. 5미터는 넘게 미끄러졌고 결국 작은 바위 앞에 양팔을 쭉 뻗은 채 멈췄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울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생각하던 찰나, 바위 옆에 서 있던 대빵이 아저씨(이름이 대영이라서 별명이 대빵이었다)가 외쳤다.
"Safe!"
미끄러져 넘어진 모습이 마치 2루를 향해 힘차게 달려가다 슬라이딩하는 주자의 모습과 닮았던 걸까. 대빵이 아저씨는 2루 심판이라도 된 것처럼 크게 외치며 양팔을 좌우로 펼쳤고 난 대빵이 아저씨를 보고 웃어버렸다. 기분이 좋아졌기 때문이다. 팔과 무릎은 다 까졌지만 그까짓 것 괜찮았다. 난 죽지 않고 살았으니까.
초등학교 3학년 때쯤엔 친구와 놀다가 대판 싸웠다. 친구는 화가 나서 내 손을 앙하고 물어버렸고 손등에 피가 서렸다. 친구 아버지는 놀래서 달려왔고, 날 화장실로 급하게 데려갔다. 그리고 내 손을 정성스레 씻겨주셨다. 이날 친구 아버지의 손과 내 손, 뽀얀 비눗물, 손과 손의 그 부드러운 감촉, 거울에 비친 두 사람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이날도, 등산을 갔던 날도, 난 사랑받았다. 난 살면서 정말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내가 한 건 없는데, 내가 잘한 건 없는데, 내가 넘어져도 싸워도, 그냥 나라는 존재로 사랑받았다. 성인이 된 내가 슬픔의 늪에서 오래지 않아 바닥을 치고 올라와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건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사랑은 부드러운 비눗물로 상처를 매만져주는 손이기도, 넘어진 사람에게 out이 아닌 safe를 외쳐주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자, 나도 내 앞에 소중한 사람의 상처를 닦아주자. 그리고 2루 심판처럼 양팔 벌려 있는 힘껏 외치자.
"Saf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