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성찰적인 글쓰기. 자기 성찰은 어느 정도 힘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그래야 뒤도 돌아보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그래서 어떻게 할 건지도 점차 정리가 된다. 그런데 몸과 마음에 어떤 힘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에서 대체 무슨 자기 성찰인가? 자기 성찰적 글은 힘이 든다. 정말 힘이 든다. 그 힘은 어디서 나오는가? 그간 쌓아온 힘에서 나온다. 그런데 힘이 없다면? 무슨 수로 자기 성찰적 글을 쓸 것인가?
분석적인 글쓰기. 이것 역시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자기 성찰적 글과는 다른 종류의 힘이다. 최소한 자신을 찌르는 것 같은 고통은 덜 하다. 하지만 힘이 있다 한들, 쓰고자 하는 주제에 무신경하다면 무슨 소용인가?
자기 성찰적인 글도 분석적인 글도 좋다. 하지만 기분 좋은 글을 쓰고 싶다. 아, 나는 기분 좋고 싶다. 기분 좋음을 느끼고 싶다. 기분 좋지 않은 일은 이미 넘쳐난다. 난 기부니가 좋고 싶다. 기부니가 좋아진다면 그게 글이든 뭐든 상관 안 한다. 난 그저 기부니가 좋아지고 싶다. 바라는 건 그거 딱 하나다.
말이 나온 김에 왜 지금 나는 힘이 없다고 느끼는지에 대해 얘기해 보자. 먼저 탈모약의 부작용. 의사에 따르면 5% 내외로 부작용이 발현하는데 그중 대표적인 것은 성욕 감퇴와 우울증이라고 한다. 나는 그 5%에 해당하는 건가? 머리카락도 나를 떠나간다. 그 사실이 싫다. 본격적인 신체 노화의 빼박 증거를 난 온몸과 정신으로 거부하고 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260만 원짜리 모공 주사 치료를 받기 시작했고 탈모약을 비닐봉지에 한가득 받아왔다. 중병 걸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탈모에는 치료가 없어요, 관리할 뿐이지,라는 의사의 말에 기가 찼고 매일 그것도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내가 마치 몹쓸 병에 걸린 것처럼 몹시 기부니가 상했다. 기부니가 더 상하는 건, 내 소중한 대갈빡에 머리카락과 이별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러니까 나는 아직 젊은데 정수리 한가운데에 광채가 서리는 꼴을 멍하니 지켜보고 서있을 생각을 하니, 그것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프로페시아 1정, 경구용 미녹시딜 0.5정과 매일 함께 하거나, 휑하니 비어 사방으로 통풍이 잘되는 대갈빡과 함께 하거나, 둘 중 하나다. 매일같이 약을 털어 넣으면서 매번 드는 생각이, 이것 참 부질없는 짓이다,라는 것인데, 나이가 50만 넘어가도 이따위 머리카락 누가 신경이나 쓸까, 확 밀어버리면 그만인데, 아니지 지금도 내 머리카락 보여줄 사람도, 봐주는 사람도 없는데,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래도 없는 것보단 있는 게 낫지,라는 알 수 없는 합리화로 귀결되곤 한다. 매일 밤마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이거라도 있는 게 어디야, 친절한 미용사 선생님 덕분에 조금이라도 일찍 탈모끼를 발견한 게 어디야, 라면서 얄팍한 감사함이 고개를 들기도 하지만, 탈모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 생각나면서, 그리고 탈모 원인의 대부분은 유전이라는 걸 알면서도, 분명 스트레스가 더 큰 원인일 거야, 라면서 의학의 진리를 호도해버리기도 한다. 굉장히 자의적으로. 스트레스 때문에 탈모가 시작되었고 탈모라는 사실 때문에 더 스트레스받고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에 더더 스트레스받고 내가 대갈빡으로 먹고살 것도 아닌데 이게 무슨 짓이냐며 더더더 스트레스받다가 오늘은 얼마나 터래끼가 자랐나 하고 정수리를 쓰담쓰담한다. 생각과 행동의 역설.
기부니가 좋고 싶다. 아, 그래 이 얘기를 하고 있었구나. 기부니 얘기. 기부니와 힘이 없다고 느끼는 얘기. 그렇지. 힘이 없어서 좋은 점과 안 좋은 점은 바로 대가리가 안 돌아간다는 것이다. 멍청해지고 있는 것만 같다. 언어 작용, 그러니까 읽고 쓰는 것이 예전보다 훨씬 더 복잡하고 피로하게 느껴진다. 제목이 뭐더라, 고요한 변화던가, 아무튼 변화에 대한 철학적 고찰, 그러니까 서양 철학의 인과론적이고 단편적인 시간 개념의 한계는 변화의 역동성을 내재한 동양 철학, 대표적으로 노자가 그 대안이 될 수 있다, 뭐 그런 내용인 것 같은데, 아무튼 피로하다. 읽는 행위가 피로하다. 그나마 덜 피로한 읽기는 희곡인데, 특히나 베케트의 부조리극은 쉽사리 말할 수 없는 재미가 있다. 덤앤더머처럼 원인과 결과를 비틀어버리는 헛소리에, 개연성이라고는 없는 행위들. 백치의 향연. 무위의 승리. 들뢰즈가 베케트와 도스토예프스키를 칭송한 건 바로 이점이었다. 둘 다 세속적인 잣대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바보들을 얘기하고 있으니까.
기부니가 좋고 싶다. 이걸 쓰기 전보단 조금 좋아졌다. 바보 같은 글을 바보같이 써갈겨대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