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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선 Oct 17. 2021

03 치즈

과묵하고 점잖고 특별한 고양이

터줏대감 치즈



터줏대감 치즈


 모두들 치즈를 '터줏대감'이라고 불렀기 때문에 나도 어느샌가부터 '터줏대감 치즈'라고 불렀다. 치즈는 꽤 오래전부터 기숙사에 자리를 잡고 살기 시작한, 말하자면 1세대 고양이라고 한다. 진한 치즈색의 짧뚱한 몸매에 하얀 양말을 단정하게 신은 치즈. 애교도 별로 없는 성격이었다. 부숭부숭한 꼬리는 울퉁불퉁하게 꺾였고, 끝 부분은 아예 뭉툭했다.


 고양이에 대해 무지했던 나는 다친 건 아닌지, 아프진 않은지 인터넷 검색을 했었더랬다. 출생 당시의 꺾임 혹은 어린 시절 영양 불균형에 의해 생길 수 있는 모양이며 아프지도 불편하지도 않다고 한다. 많은 고양이들이 그렇게 꺾인 꼬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그렇게 짧뚱하게 꺾인 꼬리를 가진 치즈는 터줏대감답게 점잖고 정중했다. 아기 고양이 프레즐처럼 애교가 넘치지도, 크림이처럼 예쁜 코트를 가지고 우렁찬 골골송을 불러주지도 않았지만 나는 치즈가 좋았다.



너구리 꼬리 치즈






 치즈는 조용히 표현하는 방법을 알았다. 캔과 그릇을 가지고 내려가 손톱으로 탁탁 금속소리를 내면 고양이들이 멀리서부터 뛰어오곤 했다. 하지만 치즈는 언제나 점잖게 느릿느릿 걸어왔다. 나는 항상 다른 고양이들이 다 모여도 치즈가 가까이 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밥을 줄 만한 조용한 장소로 걸어갔다. 뒤에서 쫑쫑 쫓아오는 고양이들은 얼른 밥이 먹고 싶어 신난 발걸음이었지만, 나는 몇 걸음마다 멈춰 서서 치즈를 기다렸다.


 서두르는 법이 없는 치즈는 밥도 천천히 씹어먹었다. 먹는 것이 조금 불편했는지 입으로 들어가는 게 반, 흘리는 게 반이었다. 식탐도 별로 없어 어느 정도 배가 차고 나면 프레즐이나 크림이에게 남은 밥을 양보하고 물러서 그루밍을 하고 앉아있었다. 그럴 때면 '에이, 조금만 더 먹지….'하고 걱정스러우면서도 어른 고양이의 관록이 느껴져 신비로운 기분이 들었다.


 신나게 밥을 먹는 크림이와 프레즐을 뒤로하고 그루밍을 마친 치즈의 곁으로 가 궁디팡팡을 해주면 치즈는 천천히 꼬리를 흔들었다. 밥을 주고 일부러 떨어져서 지켜보고 있자면 식사를 마친 치즈가 내쪽으로 와 앉기도 했다. 치즈와 내가 교감하는 시간, 나는 그 시간을 참 좋아했다.



츄르 대신 산 캔을 먹는 치즈(우) & 프레즐(좌)





말없이도 편안한 사이


 기숙사 화장실을 갈 때마다 창문으로 아래를 내려다보는 습관이 생겼다. 빨래를 널 때마다 베란다 창문으로 잔디밭을 관찰하는 버릇이 생겼다. 혹여나 어슬렁거리고 있을 고양이를 찾기 위해서다. 고양이가 보이면 나는 재빨리 준비하고 출근시간보다 먼저 내려가 고양이를 만나고 있곤 했다. 같이 출근해야 하는 룸메들도 그 이유를 알고 나서는 최소 30분씩 먼저 내려가 있는 나를 이해해주었다.


 매일 저녁 퇴근길에 기숙사로 향하는 언덕을 오르면서 두리번거리기도 했다. 어둑어둑 해가 일찍 지는 시골, 어둠이 내려앉는 잔디밭에 노란색의 무언가가 얼핏 보일 때면 가슴이 설렜다. 나는 유독 치즈와 저녁 데이트를 즐겼다. 겁 많은 크림이에게 궁디팡팡도 많이 해주었고, 일주일에 한두 번씩은 낚싯대를 가지고 아기 고양이 프레즐과 함께 잔디밭을 뛰어다니기도 했다. 그 시간이 적지 않은데도 유난히 치즈와 저녁 데이트를 한 기억들이 강렬하게 남아있다. 그 때의 마음이 가장 고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가로등이 하나 둘 켜지고 촉촉한 밤공기가 흙냄새, 풀 냄새를 연주할 때면 치즈와 함께 천천히 기숙사 주변을 걸어 다녔다. 그러다가 가로등 근처에 적당히 한적한 장소를 찾으면 그저 가만히 앉아있었다. 치즈의 엉덩이를 두드려주기도 했고, 등을 쓰다듬어 주기도 했고, 이것저것 말을 걸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은 말없이 나란히 앉아있곤 했다. 몇 시간을 그렇게 가만히 앉아있어도 시간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그건 시간을 때우거나 하릴없이 보내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 시간의 매분 매 초마다 나는 치즈와 유대가 강렬해지는 느낌을 받았고, 치즈도 마찬가지였을 거라 생각한다. 우리의 신뢰가 쌓이고 운명이 얽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별한 고양이





골골송, 부를 줄 알아?



 치즈는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일명 '궁디팡팡'을 좋아했다. 나는 치즈를 볼 때마다 궁디를 두드려주곤 했다. 다른 고양이들도 궁디팡팡을 좋아하긴 하지만, 치즈는 유달리 강도 높은 궁디팡팡을 즐겼다.


"이 정도면 거의 때리는 거 아니에요?"


 룸메가 의아해할 정도였다. 하지만 궁디팡팡을 해본 사람이라면 알 것이다. 고양이가 좋아하고 있는지 아닌지. 치즈는 싫으면 바로 자리를 떠나는 성격이었지만, 궁디팡팡만큼은 내가 그만둘 때까지 받았다. 덕분에 나는 팔이 떨어지도록 엉덩이를 두드렸다. 한 자리에서 세 시간이 넘도록 궁디팡팡을 해준 날도 있었다.


 이쯤 되자 의문이 들었다.


'난 치즈가 너무 좋고 이 시간이 너무 행복한데, 치즈도 분명 같은 생각을 하는 것 같은데. 어쩌면 즐겁지 않은 걸까?'


 표현을 하지 않는 치즈는 골골송도 불러주지 않았던 것이다. 크림이는 아주 우렁찬 골골송을 곧잘 불러주었고 프레즐도 가르랑거리는 소리를 종종 냈기 때문에 골골송은 커녕 울음소리조차 한 번도 내지 않은 치즈에게 무슨 이유가 있는 건지 궁금해졌다. 야속하다거나 서운한 건 아니었다. 그저 이유가 있다면 무슨 연유인지 알고 싶었을 뿐이다. 하지만 물어볼 방법도 없거니와 그냥 시간을 공유하는 자체로도 좋았기에 그날도 말없이 쓰레기통 위에 올라간 치즈의 궁디를 팡팡해주고 있었다.


 여름이 한창인 더운 날이었다. 게다가 하필 퇴근 후 기숙사로 올라오는 길목이었다. 옆에는 흡연장이 있어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람들과 퇴근을 하는 사람들은 모두 우리를 쳐다봤다. 나는 사람들의 시선이 조금 부끄러워 자리를 옮겨보는 건 어떤가 물어보았지만 치즈는 그 자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아마 철제 쓰레기통의 시원함이 마음에 들었으리라. 그렇게 한 시간 가량 궁둥이를 두드리던 나는 문득 치즈가 참을 수 없이 너무 좋아졌다. 치즈의 심장소리가 듣고 싶었다.


 고양이들에게 손 외의 신체를 접촉해본 적은 없었는데, 누워있는 치즈의 등에 귀를 댄 나는 그 자세로 굳어버렸다. 치즈는 귀를 댄 채로도 집중해야만 들릴 정도로 아주 작게 골골송을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퇴근 후 피곤한 육체도, 한 시간 운동한 팔의 통증도, 한여름 오후의 무더운 열기도 순간 모두 잊었다. 나는 그냥 쓰레기통 위에 앉은 고양이의 등에 귀를 댄 채 이상한 사람처럼 한참을 히죽히죽 웃었을 뿐이다.


 치즈도 언니랑 있는 거, 좋았구나?




2018.08.03. 19:40 골골송을 부르고 있어요






 기숙사 측에서는 고양이들이 골칫덩이였을 것이다. 고양이가 대중의 사랑을 받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도 고양이를 사악한 요물이라고 여기는 편견이 많으니까. 고양이 알레르기를 가진 기숙사생이 몇 번 항의한 적도 있었다. 누군가 고양이 간식을 주고 치우지 않아 개미떼가 꼬인 적도 꽤 많았다. 집이랍시고 상자를 놓아두어 비에 흠뻑 젖어 쓰레기가 된 적도 있다고 한다. 나 역시 자발적인 행동이 아닌 일터에서 고양이를 만났더라면 싫었을지도 모른다. 내 눈에 귀여운 것과 별개로, 추가 요금도 없이 일거리가 얹어지는 느낌이었을 테니까.


 밥을 챙겨주기 시작한 이후로 최대한 고양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노력했다. 밥자리는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치우고, 장난감이나 스크래쳐는 누가 버리지 않도록 밥을 줄 때 가지고 나갔다가 다시 가지고 들어왔다. 잡화점에서 구매한 몇 천 원짜리 스크래쳐는 치즈가 아주 좋아했다. 가성비 넘치게도 동봉된 캣닢 가루를 뿌려주면 냄새를 맡다가 정신을 잃고 침을 흘리며 뒹굴기도 했다. 프레즐이 몇 번인가 관심을 가진 적도 있었지만, 다른 것은 너그럽게 양보했던 치즈가 스크래쳐만큼은 자기 것이라고 고집을 부렸다. 밥에도 장난감에도 큰 흥미가 없는 치즈였기에 난 그게 내심 기뻤다. 욕심을 표현하는 건 좋은 거야, 치즈도 갖고 싶은 게 있는 건 좋은 거야. 언니가 매일 가지고 내려갈게. (따지고 보면 누나지만 그땐 모두에게 스스로를 '언니'라고 불렀다) 스크래쳐가 망가지기 전까지 치즈는 매일 그곳에 누워 뒹굴거리기도 하고 때로는 잠도 잤다. 나는 치즈가 일어날 때까지 기다렸다. 기숙사 통금시간이 다 되어 더 누워있고 싶다는 스크래쳐를 빼앗아 들고 건물로 들어가는 날이면 내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스크래쳐는 내 거야!





인간을 성장시켜 주는 갓냥이


 사람들은 성인이 되고 자신을 알게 되면서야 자신의 성향을 알게 되는듯하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난 기본적으로 우울한 성격을 타고났다. 기억하는 한 유치원 시절부터 우울했고, 학창 시절 내내 우울했으나 입시 준비 때문인 줄 알았다. 성인이 되어 취직을 하고 나서는 혼자 자취를 하며 우울함이 더욱 커졌으나 다들 그렇게 사는 줄 알고, 내가 이상한지도 몰랐다. 그 와중에 몇 번의 인간관계 실패 및 범죄 비슷한 일들을 겪으며 사람을 믿는 데에 굉장히 오래 걸리는 성격이 되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내 진짜 모습을 어디까지 공개해야 할지 몰랐고, 내 개인정보와 관련된 거라면 극도로 사소한 것까지 감추었다.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나를 꾸며냈다. 돌아가지 않는 머리로 거짓말을 지어내려니 어색할 정도로 뚝딱거리곤 했다. 그러면서 내가 좋아하고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을 속이고 있다는 데에 엄청난 죄책감을 느껴 그것이 또 괴로웠다. 그런 식으로 백 겹의 만리장성을 뚫고 내 곁에 남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을 주었다. 성인이 되며 객관적으로 판단한 내 모습은 그랬다. 쉽게 곁을 주지 않지만, 곁에 있는 사람에겐 나를 망쳐가면서라도 내 모든 것을 주는, 건강하지 않은 자아.


 놀이동산에 입사했을 때는 인생의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을 때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시기에 만난 인연들의 머릿속에서 내 창피한 모습을 다 지우고 싶을 정도로 인생 제2의 흑역사였다. 그런 때에 고양이들이 큰 힘이 되어줬다. 영악한 인간에겐 말 못 할 고민들도 고양이에게는 전부 털어놓을 수 있었다. 어리석은 인간 곁에 말없이 머물러주신 고영님. 마치 현자 같은 모습이었다. 덕분에 나는 전부 무너져 내렸던 내 안의 기둥을 처음부터 다시 세우기 시작했다. 치즈와의 저녁 데이트가 특히 큰 힘이 되어주었기에 치즈가 유달리 생각나는 걸 지도 모른다.



밤산책을 준비하며



기숙사 현관에서




사랑은 언제나 소리 없이


 그날도 아침에 밥을 주러 조금 일찍 내려갔다. 구매했던 캔을 다 먹인 후였는데, 캔이 떨어졌다고 급여하던 밥을 중단할 수는 없어서 사료를 구매해두었다. 어느새 '대대로 내려오는 고양이 밥집사' 자리는 내 몫이 되었던 것이다.


 고양이들을 부르기 위해 소분된 사료 봉지를 부스럭거리는데, 잔디밭 저 편에서 치즈가 뛰어오는 걸 보았다. 그 순간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평소에는 절대 뛰지 않는 치즈가, 높게 자란 잔디를 헤치고 폴짝폴짝 뛰어와 막상 근처에서는 뛰는 모습을 들킨 것이 민망한지 새삼스레 천천히 걸어오는 것을 지켜보는데 왜 그렇게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그때 느꼈다. 정을 주지 않으려 했는데 치즈크림프레즐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마음속에 그렇게 뛰어들어왔다는 걸. 어느새 내 심장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고양이들을 인정하게 된 순간이었다.





 퇴사를 하게 된다면 치즈를 입양하기로 마음먹었다. 놀이동산 아르바이트생이 아닌 제대로 된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면 사람 한 명 먹고살 만한 수입이 있는 직업이다. 고알못인 내가 봐도 나이가 적지 않고 무뚝뚝한 치즈는 다른 곳에 입양되기는 어려워 보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해주고 싶었다.


 고양이는 영물이 맞나 보다. 내 마음을 어떻게 안 건지, 2018년 12월 겨울 퇴사한 이후 치즈도 기숙사에서 모습을 감추었다.


 오래 일했던 직원들은 봄이 되면 나타날 거라고 했다. 치즈는 원래 겨울이 되면 사라졌다가 봄이 되면 다시 나타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였다고, 오히려 내가 있는 동안은 초겨울이라도 자리를 지킨 것이 처음이라 놀랐다고. 그래서 애끓는 마음으로 봄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치즈는 아직까지도 나타나지 않았다.


 지금도 종종 치즈를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첫 고양이, 치즈. 내게 사랑과 행복과 기쁨을 알려주고 훌쩍 떠난 어른 고양이, 치즈. 다시 한번 내 안의 선함과 영혼의 반짝임을 가르쳤기에 현자처럼 홀연히 사라진 걸까? 대현자 치즈가 가르쳐준 8개월간의 인생수업은 완벽했다. 치즈라면 어디선가 또 그 기묘한 매력으로 집사를 간택해 행복한 여생을 보내고 있을 거라 믿는다.


치즈 증명사진


새벽 데이트 중 집사의 신발을 베개삼아


사랑하는 치즈, 잘 지내고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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