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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천지 Oct 15. 2021

어느 날, 어느 순간 갑자기 졌다

1. 남녀가 함께 근무하는 부서의 책임자는 남자가 되어야 한다.

2. 자격이 같은 남녀 직원 중 한 명만 승진할 수 있다면 남자를 시켜야 한다.

3.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들은 의무를 다하지는 않으면서 사실상 특별대우를 원한다.

4. 여자들은 지켜야 할 의무는 다하지 않으면서, 자신들의 권리만을 내세운다.

5. 여성이 술에 취해 돌아다니는 것은 남자보다 더 보기 흉하다.

6. 여자가 욕설이나 음담패설을 하는 것은 남자보다 보기에 더 좋지 않다.

7. 경제적으로 가족이 부양해야 할 책임은 여자보다는 남자가 더 크다.

8. 남자는 될 수 있으면 약한 모습을 드러내지 말아야 한다.

9. 재산을 딸, 아들 구별 없이 똑같이 물려주겠다.

10. 결혼한 딸에게도 아들과 똑같은 유산을 물려주게 하는 상속제도는 잘못된 제도이다.

11. 형광등 교체, 컴퓨터 점검, 무거운 짐 옮기기는 남자가, 요리, 빨래, 청소는 여자가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

12. 명절 때, 장거리 운전과 성묘는 남자가 하고, 차례상 음식 마련은 여자가 하는 것이 공평하다.

며칠 전에 참여한 양성평등 캠페인에서 진행한 양성평등 의식 설문조사의 질문들이다. 많은 설문조사에 참여해봤지만 이토록 문제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설문은 처음이다. 작성자가 대부분의 질문에 절대 그렇지 않다는 항목을 체크하고 싶게 만들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거라면 오케이 수용하겠지만 넓은 아량을 베풀어서 다시 읽어봐도 모든 문제들이 다 개똥같다. 지나가던 개한테 물어도 개소리라고 멍! 하며 대답할 것이다.

평등이라는 개념 앞에 왜 자꾸 본인들의 사상을 집어넣는지 모르겠다. 저런 설문을 할 거였으면 적어도 여자 1, 남자 1둘이서 만들어야 하는 건 아닌가. 이봐요 작성자 양반, 거 대체 듣고 싶은 말이 뭐요? 절대 당신 생에 그 말은 못 듣게 오늘부터 물 떠놓고 도가니 나갈 정도로 빌라니까.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분들, 대체 어떤 특별대우를 희망하시나요?

평등을 주장하는 여성인 미란은 면접장에서 결혼 얘기 안 하는 거, 요리 안 한다고 말했을 때 토 달지 않기, 담배 피우고 술 마시는 내 모습 흉보는 건 네 마음인데 입 밖으로 내지 않기, 내 건 내가 할 테니 네 건 네가 하기(빨래, 청소, 형광등 교체, 무거운 짐 나르기 등), 박덕순이 정년으로 퇴직하면 경제적으로 부양하기, 일을 존나 잘해서 승진하기, 일을 개 잘해서 책임자 하기 정도가 바라는 특별대우인데 대체 어떤 의무를 더 해야만 모두에게 당연한 게 미란에게도 당연해질 수 있을까요?

나름 공적인 설문에서 그것도 평등을 다루는 문제에서 이런 식으로 불평등을 야기하는 게 가시화되니 속이 쓰리다.

문제 생길까 봐 숙여주고 치사해서 모른척해 주고 더러워서 져주는 것도 이런저런 핑계로 그 모든 게 쉬워지고 당연해져서 어떤 취급을 당해도 되는 사람이고 싶지 않은데 저런 간단한 설문조사 하나가 나를 지게 만든다. 나 왜 자꾸 지기만 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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