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염천지 Oct 15. 2021

박덕순의 추석

박덕순의 시댁은 무지함이 일종의 특권이자 권력이 돼버린 가풍이 있다. 오랫동안 잘못된 풍습에 갇혀 지낸 박덕순의 명절은 명절이 오기 전 2주일 전부터 시작된다. 홀로 제사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이것저것 따져가며 장을 본 후 틈틈이 재료를 다듬어야 하고 배고프다며 떼쓰는 어린 자식들을 옆에 끼고 음식을 만들고 치우기를 반복하기도 한다. 더군다나 시어머니의 폭언까지 흘려듣는 능력을 발휘해야만 하는 여간해선 견디질 못할 강행군이었다. 20년 넘게 추석, 명절, 얼굴도 모르는 조상들의 제사를 지내느라 박덕순의 허리는 펴질 새가 없었으나 이제 더 이상 그 누구도 박덕순의 허리를 마음대로 굽히지 못한다.

2021년 박덕순의 추석은 추석 하루 전부터 시작됐다. 그 누구의 제사도 지내지 않지만 가족들과의 식사를 위해 박덕순은 부지런히 움직였다. 대목 장을 보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시장을 방문한 후 돌아온 박덕순의 손에는 음식 꾸러미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자식들이 좋아하는 갈비찜을 해주기 위해 정육점에 방문한 건지 등갈비가 가득 들어있는 봉지가 있었고 색 조합을 고려한 듯한 콩나물, 고사리, 시금치 등의 삼색 나물들, 추석 음식 후식의 대명사인 사과와 배, 튀김에 필요한 튀김가루, 식용유 등 여느 집과 같이 명절 음식에 필요한 재료들이 있었다. 귀가 후 잠깐 앉을 새도 없이 박덕순은 바로 재료 손질에 돌입했다. 갈비 핏물을 빼서 삶고 미리 양념을 잰 후 숙성을 위해 냉장보관을 하고 나물들을 손질하고 튀김에 필요한 고구마와 새우, 오징어를 손질한 후 박덕순의 추석 음식 미리 보기는 끝이 났다.

추석 연휴, 어김없이 박덕순의 하루는 그 누구보다 일찍 시작됐다. 바스락, 잘그락 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 이미란은 방 문을 열고 슬금슬금 나가 박덕순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튀김에 몰두하고 있는 박덕순과 박덕순을 도와 산적 꼬치를 꿰고 있는 동생을 확인한 후 슬쩍 고구마튀김 하나를 손에 넣었다. 갓 튀겨져 나온 고구마는 입천장이 까질 만큼 뜨거웠지만 가학적인 행위가 대수롭지 않을 만큼 맛있었다. 음식 가짓수가 적어 도울 게 없다고 말하는 박덕순을 위해 막내딸은 꼬치를 꿰고 이미란은 주변 정리를 도왔다. 10시가 조금 넘은 이른 시간 둘째 아들 내외가 방문했다. 오후에 방문하라는 요청에도 기어코 아침에 방문한 둘째 며느리는 뭐라도 돕고자 주방 근처를 서성였으나 이미 완벽한 업무분장에 끼어들 틈이 없었다. 오랜 시간 시댁에 시달려온 박덕순은 며느리를 최대한 배려하고자 노력한다. 아들이 처가에서 음식을 하고 돕는다면 며느리가 나서서 하겠다는 걸 말리지는 않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아무것도 하지 말아라가 박덕순의 신념이다. 내가 이거 하면 너도 이거 해! 혹은 내가 이거 했으니까 너도 이거 해! 가 아닌 호칭에 정해진 역할이 없다는 것이다. 며느리라서 음식을 하는 게 아니고 사위라서 운전을 하는 게 필수가 아니란 거다.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박덕순과는 달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둘째 며느리는 기어코 일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작가의 이전글 미란과 란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