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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염천지 Nov 25. 2021

2년 후, 우리는 늙어있었다

토요일 아침, 알람이 울리기 전에 일어났다. 방문을 열고 놀란 어투로 기상 여부를 묻는 박덕순의 목소리에 깜짝 놀라 시간을 확인해 보니 8시 30분이다. 알람이 울리기 20분 전에 깨우는 건 반칙이다. 박덕순의 뜬금없는 반칙 때문에 토요일을 20분 일찍 시작하고 말았다. 필요 시간이 필요 이상으로 많아져 여유롭게 외출 준비를 마쳤고 나는 포항으로 출발했다.

태어나서 처음 밟아본 포항 땅은 생소하고 낯설었지만 묘한 안정감이 있었다. 어느 중소도시에서나 볼 법한 인테리어의 터미널은 기시감이 느껴질 정도로 익숙했다. 김밥과 삶은 달걀, 사이다가 어울리는 터미널에서 5분 정도 기다리자 멀리서 친구의 얼굴이 보인다. 우리는 그렇게 거기서 재회했다.

점심시간쯤에 만난 우리는 터미널 옆에 위치한 몰에서 점심부터 먹었다. 제법 큰 몰이었는데 여기저기 불이 꺼져있었고 작동하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도 있었을뿐더러 문을 열지 않은 식당들이 더 많았다. 건물 내부 공사를 전체적으로 진행하고 있는 건지 아니면 건물을 없앨 요량인지는 모르겠지만 건물의 인상은 황폐했고 그 황폐함 속에서 우리는 탄탄면을 즐겼다. 처음 가본 곳에서 처음 먹어본 탄탄면은 짰다. 매우 짰다. 소금의 짠맛이 입안 가득 담겼고 내 침은 바닷물처럼 짜게 느껴졌다. 바닷물을 더 이상 입에 담을 수 없어 우리는 식사를 빠르게 마무리했다. 매우 신기한 그릇에 담겨 나온 탄탄면은 그렇게 그 자리에 남겨두고 나왔다.


밥을 먹은 후 우리는 커피 한 잔씩 포장한 후 영화관으로 올라갔다. 이 친구와 만나면 항상 영화를 본다. 보자고 하는 쪽은 나고 그러자고 하는 쪽은 친구. 이번에도 나의 제안으로 우리는 장르만 로맨스를 보게 됐다. "넌 무슨 말을 그렇게 서운하게 해? 내가 쓸데없는 말을 얼마나 좋아하는데.", "어, 나 불편한 거 되게 좋아해."라는 대사를 뇌리에 남긴 채 영화는 끝이 났다. 극한직업처럼 극한의 코미디 영화는 아니지만 중간중간 말맛이 좋은 대사들이 많아서 보고 듣는 재미가 있었다. 캐릭터들이 하나같이 찌질하고 짜증 나는 제멋대로인 인간들이어서 중간중간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들이 있었지만 연말에 가볍게 보기 좋은 영화였다.

영화를 본 후 우리는 원래 바다에 가기로 했었다. 바닷가가 즐비한 도시에 왔으니 응당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고작 밥 먹고 영화만 봤는데 피곤해진 우리는 강이 보이는 카페로 가기로 했다. 바다로 흘러가고 있는 강물이 보이고 친구의 집과도 가깝다고 하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카페로 갔다.

다들 바다에 가기 싫은 건지 카페에는 사람이 많았고 겨우 자리를 잡은 우리는 루미큐브를 세팅하고 음료를 가져올 사람을 정하기 위해 가위바위보를 했다. 인간답게 한판승으로 하고자 했으나 친구의 역겨운 앙탈로 삼세판으로 경기가 이어졌다. 한판승으로 끝냈으면 내가 이겼을 텐데 삼세판으로 진행된 경기는 2 대 1로 지고 말았다. 제기랄. 게임에서 진 내가 음료를 서빙하고 우리는 오늘 만남의 목적인 루미큐브를 시작했다. 매번 휴대폰으로만 하다가 카드를 손에 쥐고 게임을 하니 두근거렸다. 마치 뉴질랜드에서 크루아상이 맛있는 그 카페에 앉아 있는 기분이랄까. 한껏 상기된 상태에서 첫 번째 경기는 내가 승리했다. 한껏 흥에 취해 친구를 약 올린 후 두 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그 흥에 날개라도 달아주려는 것인지 두 번째 경기도 나의 승으로 끝났고 마지막 경기까지 나의 승리로 완승했다. 통유리로 들어오는 저무는 석양과 나에게 세 번이나 패배해 짜증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 친구는 집어치우고 밖에 나가자며 나를 보챘다. 친구 기분과는 상관없이 신난 나는 음료만 다 마시고 가자며 친구를 붙잡아뒀다.


외국에서 만난 우리는 주로 팟타이와 인도 카레 등 향신료가 강한 음식들을 자주 먹었다. 오호페 비치에서 먹은 팟타이처럼 맛있는 팟타이를 먹고 싶다는 친구의 말에 근처 타이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다. 곳곳에 코끼리 동상이 있고 라탄 조명들로 동남아 분위기 물씬 풍기는 가게는 팟타이 맛을 잘 아는 것 같진 않다. 친구야, 다음엔 우리 동네로 와. 여기 존맛 팟타이도 있고 존맛탱 인도 카레도 있어. 맛이 뭔지 알려줄게.

이른 저녁을 먹은 후 우리는 집으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걷고 웃고 떠들어도 멀쩡했던 우리는 이제 하루 종일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없게 됐다. 나야 항상 힘들어했지만 이 친구는 말리고 싶을 정도로 방방 뛰던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나랑 비슷해져있었다. 분명 집에 다양한 무게의 아령과 각종 운동기구들이 있는 걸 봤는데 근력이 체력과 정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집 나간 체력을 불러오기 위해 우리는 극한직업을 틀고 가만히 누워있었다. 아는 대사가 나오는 장면에선 먼저 대사를 치며 극 중 인물인 양 흉내를 내기도 하고, 알면서도 웃기는 장면들에선 깔깔 웃으며 휴식시간을 만끽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는 2년 전 마지막으로 봤을 때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철없던 시절의 그 모습이 지우개로 지운 것처럼 지워져있었고, 말괄량이 소녀였던 그 친구는 말괄량이 소녀의 곱게 땋은 머리처럼 정돈된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제 더 이상 소녀는 아닌 걸로.

우리는 함께한 기억들을 잘 접어뒀고 그 기억들을 꺼내서 같이 회상하는 시간들을 가졌다. 꾸깃꾸깃 접힌 기억들 속에서 헤지고 있는 것들도 있지만 그곳에 또 새로운 기억들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그렇게 오랜만에 만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고 위로가 위안이 됐고, 또 다음을 기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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