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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zejebell Mar 03. 2024

마녀 사냥과 나락

쉽게 판단하고 쉽게 말하며 쉽게 처형당하는 세상

중세시대 유럽에서는 수백만으로 추정되는 무고한 사람들을 마녀로 만들어 목숨을 빼앗았다. 차라리 그냥 죽이기만 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온갖 고문을 가한 뒤 억지로 자백을 받아내어 화형으로 마무리하였다고 한다. 신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어쩌면 그렇게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었을까? 사람으로서 하지 말아야 하는 그런 일들이 실제로 시간이 다를 뿐인 이 세상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길 포기한 그들이 스스로를 신의 대리인이라, 독실한 신자라 생각했다는 것이 더욱 소름 끼치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그것이 다 그 당시 권력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가진 자들의 안전장치에 불가했음을 알고 있다. 그때 당시의 유럽은 신에 대한 믿음이 국가를 유지하는 중요한 부분이었기에 이단자들을 처단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국가와 교회에서 볼 때 이단자들은 몹시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그런데 마녀 사냥이 차라리 그들의 정적이나 권력에 있어서 숙적들을 처리하는데 쓰였으면 모르겠는데 가난하고 힘없는 여자들과 정신 장애인들, 남과 다른 점을 지닌 소수자들, 역시 힘이 없는 그런 사람들이 대상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런 권력자들의 마녀 사냥은 곧 다른 계층에게로 전파되었다. 그 방식은 현재의 시대에도 몹시 익숙하고 유효한 방식이다. 평소에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과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사람, 질투와 증오, 미움의 대상을 마녀로 몰아 서로를 고발하고 죽이게 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가 마녀 사냥을 하는데 정신이 팔려 정작 잘못된 체제와 불의한 권력자, 자격의 없는 성직자들은 보다 안전해졌다. 다른 사람들을 고발하는데 열정을 보이며 스스로를 안전하다고 여겼다. 


현재에도 여전히 이런 마녀 사냥이 이루어지고 있다. 사람을 한 순간에 나락으로 보내버리는 것은 일도 아니다. 많은 상황에 있어 인권이란 것은 정의라는 이름 아래 무기력 해져 버린다. 진정한 진실이 어디에 있는지는 알기도 어렵고 너무나 복잡한 과정이기에 그것을 알기 전까지만이라도 판단을 유보하는 것은 더 놀라운 일로 금방 잊혀 버리는 오늘날에는 불가능해 보인다. 이미 마녀 재판은 여론에 의해 열려 버렸고 누군가는 오늘도 재판대에 올라 나락으로 떨어져 버린다. 


스스로를 정의의 사도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만이 남아 그들만의 재판을 계속해 나간다. 여전히 중세 시대의 유럽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사회의 구조는 진짜로 책임져야 하고, 진짜로 비난받아야 하는 사람을 피해 힘없고(때로는) 남들과는 다른 약자라고 생각되는 사람들을 마녀로 쉽게 만들어 버린다. 여전히 정의에 목마른 사람들이 넘쳐나는 이유는 정의롭지 못한 사회에서 조금이라도 그 정의를 실현하고 싶어 하는 진짜 좋은 의도에서 출발했을지도 모르겠다. 현대에 모든 사람들은 정의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을 수도 있다. 스스로를 로빈 훗이나 홍길동처럼 착각하고 있는지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고 자신의 손으로 직접 정의를 탄생시키고 싶어 한다. 그러나 그들에게 그런 자격이 어떻게 주어졌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 같아 보인다. 


이제는 조그만 실수조차 용납이 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다시 돌이킬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대신 여론 재판만이 유일한 정의의 통로가 되어버렸다. 

옳고 그름이 이미 정해져 버린 사건은 그에 관계되어 있는 사람들 모두에게 어떤 변화의 가능성을 열어두지 않는다. 자신만의 정의를 무기로 타인을 공격하는 것은 스스로에게 정당성을 부여해 주어 그것이 올바른 행동이라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한 발 더 나아가 상대방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발언을 스스럼없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게 된다. 이것은 정의의 실현이 아니다. 


자신이 가진 정의감을 좀 더 유용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여론을 만들어 재판을 하는 것이 아닌 진실에 대한 성찰과 좀 더 나은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어떤 한 사람을 나락으로 보내기는 쉬운 일이다. 그런데 이런 식의 정의가 진짜 이 사회에서 필요한 일일까? 진정으로 이 사회가 좋아지기 위해서는 자신의 실수에서 배우고 성장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스스로 성찰을 통해 발전할 수 있는 개인이 많아지는 것이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실수를 통해 배울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가 없는 사회라면 너무 무서울 것 같다. 



이것은 호랑이 같은 맹수들에게나 어울릴만한 법이다. 아니 그보다 더 끔찍하다. 왜냐하면 호랑이들은 먹을 것을 다툴 때만 서로를 물어뜯지만, 우리 인간은 말 몇 마디 때문에 서로를 죽였던 것이다.


-볼테르/관용론



누군가를 판단하지 않고 살아가기란 어려운 일이다. 무언가를 판단해야 행동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기로 자신이 가진 판단의 기준들, 규범, 문화적 차이, 기분, 논리적 근거들, 사실, 이익, 양심, 가치 등을 스스로 의심해볼 수 있는 힘을 또한 가지고 있어야 한다. 만일 그 합리적 의심에 따라 자신의 판단이 잘못된 기준을 따르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기꺼이 그 잘못된 기준을 바꿀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개인들이 많아지게 되면 많아질 수록 이 사회는 불행해 질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되돌아볼 수 있는 사람일 수록 자신의 판단의 무게를 잘 알수 있게 된다. 사회가 혼자만 살아가는 것이 아니란 것을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런 생각을 하는 내 자신이 실수를 많이 하는 사람이란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늘 다른 사람의 관용과 이해로써 성장할 기회를 얻고 있는 자신이 혹시라도 잘못된 판단으로 인해 이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고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 가능성도 있음을 알고 있어서 이다.

다른 사람의 시선에서 자유롭고 싶지만 그들을 무시하고 싶지도 않다.

다른 사람의 판단과 평가를 두려워 하기보다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넓은 마음과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내가 보여주는 공감과 이해, 판단 유보로 누군가가 더 나은 시간과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하지 않을 이유가 뭐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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