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루한 기다림
사람과 관계를 제대로 맺는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는 것만 같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그런 시절이 있었다.) 친구들을 사귀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가기만 해도 되었다. 물론 내향적인 아이인 경우 먼저 말 걸기 힘들기 때문에 쭈뼛거리기도 하지만 아이들 중 적어도 한 명 이상은 외향적인 아이가 있기 마련이었다. 그런 아이가 말을 걸어주면 함께 놀이를 할 수 있게 된다. 어디에 사는지, 공부를 잘하는지, 부모님이 부자인지 그런 건 아이들의 관심 밖이었다. 부족한 장난감과 지금보다 열악했던 놀이터에서 가능한 창의성을 발휘하여 놀이를 만들어 놀았다. 그 당시에도 지루함은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고 지루함을 이기기 위한 놀이들은 계속해서 만들어졌다.
지금은 그때와 반대로 지루할 틈이 별로 없다. 아이들도 어른들도 그들을 자극시켜 줄 수 있는, 관심거리도 추천해주고 있는 스마트폰이 끊임없이 무언가를 던져주고 있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 TV를 바보상자라 부르며 TV를 보며 자라나는 세대에 대한 어른들의 걱정이 있었다. 아마 현재의 스마트폰을 보며 자라는 아이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 TV이든지, 스마트폰이든지 중요한 것은 아이들, 어른들 할 것 없이 지루함을 조금도 못 견뎌한다는 것이다. 이는 생활에 모든 부분에 있어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참을성과 인내심을 이 필요한 분야에 있어서는 그 어려움을 더 크게 만들고 있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기다림, 인내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어떤 사람이든지 관계를 만들어 나가는 데 있어서 인내하는 부분이 없다면 그 만남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인간관계에 있어서 모든 것이 어떤 배움과 성장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관계 역시 오래가지 못하게 된다. 누군가를 만나 관계를 맺는다는 것은 그에게 뭔가 자신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즐거움일 수 있고 유쾌함일 수도 있으며 지적 호기심일 수도 있다. 물론 직장에서의 어쩔 수 없는 관계도 있다. (그것은 더 많은 인내심이 필요하다.)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이러한 매력을 미처 더 알아나가기 전에 조급함과 즉각적인 결과를 원하는 것만큼 어리석은 일이 없다. 사람과의 관계는 조급한 성질을 가진 사람의 일방적인 마음으로 생겨나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급하든지 아니든지 상관없이 시간이 충분히 흘러야만 된다. 그러나 급하게 결실을 보기 원하는 사람은 기다림을 지루함으로 인식하고 그것을 메꾸기 위한 다른 행동들에 돌입하게 될 수도 있다. 그러면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성급한 결정을 내리게 되고 이러한 몇 번의 결정을 통해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서있는 자신을 언젠가 깨닫게 된다. 너무 늦지 않을 때 깨닫게 되면 다행이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하다.
인내심은 지루함과 연결되어 있다. 빠른 결실을 원하는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지루함은 제거해야만 하는 위험요소일 수 있지만 세상의 많은 가치 있는 것들은 여전히 지루한 시간을 통과해야 얻을 수 있게 된다. 특히 사람과의 제대로 된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고 충분한 기다림은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여기서 얻게 되는 지루함에 대한 인내심과 참을성, 또는 창의성(지루함을 이기기 위한)은 내 삶에서 마주하게 되는 여러 관계와 문제들을 다루는 힘을 갖도록 해준다.
순간의 감정을 참지 못함으로 일어나게 되는 여러 가지 비극들과 잘못된 선택은 더 나은 방향으로 갈 수도 있었던 우리의 삶을 그저 그런, 혹은 더 나쁜 상황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내심과 참을성은 자신을 바보로 만드는 덕목이 아니다. 경험에서 배우고 쌓아가게 되면서 자신을 더욱 단단하고 강하게 만들어 주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그리고 이것을 제대로 배운 사람은 사람과의 그 어떤 관계에 있어서도 절대 조급해하지 않으며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포기하지 않고 끝을 보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기다림은 살아내야 하는 것을 살아가는 아주 기본적인 방식이자, 존재가 현실을 살아가는 양상이다. 어쨌든 삶을 살아내야 하고 그게 전부인 이상, 낙관도 비관도 들어설 자리가 없다. 삶이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이유는 삶 자체가 의미라는데 있다.
- 로베르 샹피니, 고도를 기다리며에 대한 기고문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