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화된 21세기, 현재에도 세상 곳곳에는 야만이 히죽거리며 요동치고 있다. 전쟁, 테러, 살인, 성폭행, 폭력 등 이런 끔찍한 단어만 야만이 아니다.
“프랑스 사람들은 정말 이기적이죠. 지들은 거위 간이나 달팽이를 먹으면서 왜 남의 나라 음식문화를 간섭하는 겁니까?” 심지어는 “브리지트 바르도라는 여자 어디 살아요? 그 여자, 참 오지랖도 넓지, 남이야 보신탕을 먹건 말건 왜 자기가 난린지 모르겠어요. 영화배우라면서 영화나 찍을 것이지 건방지게 남 먹거리에 왜 참견이랍니까?” 요즘은 이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지만 십여 년 전만 해도 참 자주 듣던 말이다.
사실 ‘보신탕’하면 매번 브리지트 바르도가 창설한 <동물애호가협회>가 화살의 과녁이었다. 그들이 한국 음식문화를 공격하고 비난한다는 이유에서다.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과장되고 정확하지 않은 소문을 전해 듣고 프랑스에 반감을 갖는 사람들이 없길 바란다. 이십여 년 전, 프랑스의 동물애호가협회가 한국에 보신탕 문화와 식용으로 키우는 개 사육과정 그리고 잔인한 도살을 중지해달라고 편지를 보낸 적은 있다.
브리지트 바르도가 이끌고 있는 프랑스 동물애호가협회 <3천만 친구들>.
그러나 그들의 항의는 우리한테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들은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의 고래잡이나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즐겨먹는 거북이 살상을 포함해서 전 세계 모든 사람에게 간절한 메시지를 전한다. 그들은 모든 나라에 살아있는 생명체를 잔인하게 다루지 말 것이며 고통스럽게 죽이지 말 것을 간곡하게 요청하는 것이다.
언젠가 인터넷 뉴스에서 오수 마을이 보신탕을 어느 곳보다 맛있게 한다고 해서 동물 애호가협회 소속 회원들이 모여 시위했다는 기사를 본 일이 있다. '오수의 개'로 잘 알려진 곳, 그런 충견이 나온 마을에서 보신탕을 먹기 위해 개를 죽인다는 것에 항의할 수밖에 없다는 회원들의 말에 나 역시 공감한다.
‘오수의 개’는 전라도 임실군 오수마을에 전해오는 감동적인 이야기다.
옛날 개를 기르며 살던 남자가 있었다. 어느 날 이웃 마을 잔치에 갔던 남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해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풀밭에서 잠이 들었다. 바람이 불고 풀밭에 불길이 일기 시작하자 개는 주인을 깨워보려 했지만, 남자는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안절부절 못 하던 개는 불길이 주인 가까이 번져오는 것을 보고 개울가로 달려가 제 몸을 적셔 주인 근처 풀밭에 뒹굴며 풀을 적셨다. 쉬지 않고 그 일을 반복하던 개는 지칠 대로 지쳐 죽고 말았다.
불길은 잦아지고 시간이 흐른 후에야 잠에서 깬 남자는 주위가 시커멓게 불에 탄 걸 보고 놀라서 일어났다. 신기하게도 자신이 누웠던 자리만 푸른 풀이 있어 주위를 살펴보다 온 몸이 젖은 채 죽어있는 개를 발견했다. 그제야 남자는 불이 난 상황에서 충직한 개가 자신을 살린 것을 깨달았다. 남자는 너무나 감동하여 고마운 마음에 개를 고이고이 묻어주고 그 옆에 나무를 심어서 갸륵한 개의 넋을 기렸다. 사람들은 그 나무를 ‘오수’라 불렀다.
오수 마을의 의견상
이제 보신탕의 타깃은 한국이 아니라 중국이다. 우리나라보다 중국에서 식용 개 사육과 도살 비율이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한다. 프랑스 텔레비전 방송에서 세인트 버나드 사육에 관해 취재한 내용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세인트 버나드는 할리우드 영화 <베토벤> 시리즈로 잘 알려진 개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산속에서 사람을 구하는 성견으로서 스위스에는 기념관까지 있다.
영화 <베토벤 2>의 두 주인공 세인트 버나드 한 쌍.
오래전 알프스에 갔을 때, 그 마을에 사는 분이 ‘오수의 개’처럼 세인트 버나드에 대해 전해지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수도원에서 살던 개가 눈 속에 파묻힌 주인을 살려 냈기에 이름 앞에 세인트가 붙여졌고, 지금도 산에서 조난당한 사람을 구조하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고 했다.
알프스 구조견 세인트 버나드
그런 개를 단지 근수가 많이 나온다는 이유로 열악하고 좁디좁은 곳에서 사육하면서 야비하게 끊임없이 새끼를 낳게 하고 도살하는 그들과 더불어 그런 고기를 찾는 사람들은 대체 무슨 생각을 하면서 먹는 것일까?
프랑스 동물애호가협회가 각 나라의 음식문화를 무조건 맹목적으로 비난하고 공격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그들의 활동에 공감하게 되었다. 동물 해호가 협회 회원들은 적어도 식용으로 이용되는 동물들이 사육되는 동안과 도축되기 전까지는 학대하거나 고통을 주지 말아야 한다고 당부하며 홍보한다.
굳이 글로 표현하지 않아도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기사 혹은 동물과 관련된 특정 프로그램에서 무수히 많은 동물들이 잔인한 사람들에 의해 불결하고 척박한 곳에서 학대당하고 고통당하는 것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런 곳에서 비참하게 도살된 고기를 너무나 평범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음식으로 먹는다는 것에 전율을 느낀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몇몇 나라에는 경견 대회가 있다. 그레이하운드나 명견이라고 이름난 개들이 잘 훈련받은 상태에서 치열하게 달리는 것이다. 개들의 본능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므로 전력을 다해 달린다. 야비한 주인들과 경견장에 모인 사람들은 각각의 개들에 돈을 걸고 내기를 한다. 그런 과정에서 개들은 탈골되고 근육이 늘어나거나 불구가 되는 일이 많다고 한다.
달리지 못하게 된 개들은 좁은 공간에 수용된다. 그곳에서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치료조차 받지 못한 채로 죽어간다. 한때는 경기장에서 주인과 관중의 열화와 같은 환호를 받으며 죽기 살기로 뛰던 개들은 아무런 희망 없이 고통스럽게 죽음을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다. 프랑스 동물애호가협회에서는 주인조차 돌보기를 포기한 개들을 위해 돈을 지불하고 프랑스로 데려와 수의사들이 치료해주면서 보다 쾌적하고 넓은 공간에서 자유롭게 지낼 수 있도록 돌보기까지 한다.
아울러 프랑스 텔레비전 3 방송에서 방영한 프로그램에서 아시아 사람들이 곰쓸개의 담즙을 먹기 위해 살아있는 곰의 쓸개에 호스를 꽂고 필요할 때마다 담즙을 받는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병든 곰들을 더럽기 짝이 없는 철창 안에 가둬 둔 채, 곰보다 훨씬 작은 인간들이 학대하고 비열한 얼굴로 담즙을 받아먹는 그 자체가 야만이고 악마의 얼굴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아주 오래전, 문화방송에서 용감한 기자가 살아있는 곰쓸개에 호스를 꽂은 야만의 현장을 생생하게 취재해 방송해서 충격을 받았는데, 오랜 세월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런 일이 계속되고 있다니! 정력에 좋다는 이유로 그런 짓을 한다는 건 비난받아 마땅하다. 얼마나 정력이 필요하고 얼마나 오래 살기를 바라길래 그런 몹쓸 짓을 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다.
프랑스와 영국의 수의사들이 그곳을 찾았을 때, 좁은 철창에 갇힌 채 호스를 끼고 서 있는 곰들은 저항은커녕 지친 채 생기조차 없어 보였다. 곰들을 어떤 방식으로 포획해서 소유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수의사들이 곰들을 소유하고 있는 주인들에게 곰들의 건강상태를 진찰하고 가능하다면 치료해주고 싶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그들은 일언지하에 거부했다. 결국 수의사들은 주인들이 원하는 돈을 지불하고 곰들을 구조하기로 했다. 곰 한 마리당 치러야 하는 금액이 적지 않은 지라 방송 당시 여섯 마리 정도밖에 데려오지 못했다고 말하는 의사의 눈엔 눈물이 고여 있었다.
프랑스 텔레비전이 방영한 다큐, 구출된 곰 6마리.
지치고 한을 품은 곰의 쓸개를 뽑아 마시는 사람들은 진정 그들의 정력과 건강이 원하는 대로 좋아질 거라고 믿는 걸까? 분노를 느낄 뿐이다. 수의사들이 데려온 곰들은 오랜 기간 담즙을 빼앗겨 건강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혼신을 다해 치료해주는 수의사들의 정성과 사랑으로 점차 기력을 되찾아갔다. 수의사들은 앞으로도 후미진 곳에서 고통받고 생명의 위협을 받는 곰들을 구출할 계획이라 했다.
식량이 없어 굶어 죽는 상태가 아닌 요즘 세상에 정력을 향상한다는 이유만으로 야만의 행동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과 그들의 그릇된 욕구를 충족시키고 돈을 벌 욕심으로 생명이 있는 동물들을 고통받게 하는 것은 자연의 섭리를 그르치는 일이다.
사람의 모습을 하고 사는 이 세상에서 좋은 마음으로 서로 사랑하고 배려하며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나보다 힘없고 어려운 이웃을 돕고 우리 주위에 생명 있는 동물이나 식물조차도 함부로 괴롭히거나 짓밟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일까?
도를 넘어선 정력과 수명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흉측하고 혐오스러운 괴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온 나라, 온 세상에 비정상적으로 번져가는 건강과 성에 대한 지나친 관심이나 잘못된 정보가 결국엔 죄 없는 동물에게까지 피해를 주는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생존을 위해 음식을 먹어야 하지만 식용과 실험용으로 이용되는 수많은 동물들이 적어도 죽음 직전까지는 비참하게 고통당하지 않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문명화된다는 것, 교양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올바른 마음으로 남을 배려하며 참되게 산다는 것, 생명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며 산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만물의 영장’인 참된 사람으로서 자연과 함께 사는 길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