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동 가득한 사람 이야기 24화 / 의인들과 방관자들
사람들이 지하철이나 버스 그리고 거리에서 일어나는 폭력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방관한다는 뉴스가 나올 때면 나는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연이어 보도된 의인들 이야기는 우리 사회에 희망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해 준다.
시간이 좀 지난 일이긴 하지만 부산에서 발생했던 사건이다. 강도가 버스 정류장에 있던 할머니 손가방을 빼앗았다. 가방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할머니를 때리고 밀치며 달아나는 순간, 현장을 지나던 버스 기사님이 상황을 목격했다. 그는 범인이 도주하는 길을 추격해서 끝내 날치기 강도를 잡았고 심하게 충격받은 할머니에게 가방을 되찾아 주었다.
또 다른 이야기는 서울 낙성대 전철역 근처에서 있었던 사건이다. 사건 당일 범인은 낙성대 전철 근처에서 알지도 못하는 할머니를 이유 없이 때리다가 마침 그곳을 지나던 젊은 여성을 보자마자 그 여성이 자신을 쳐다본다며 폭행하기 시작했다.
무참하게 맞는 피해자를 본 한 남성분이 이를 제지하자 범인은 근처에 숨겨두었던 칼을 갖고 와서 그 남성분에게 달려들었다. 칼을 든 범인과 몸싸움을 하던 남성분은 팔을 칼에 찔려 중상을 입었다. 무섭고 다급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고 여러 시민과 고등학생들까지 합심해서 범인을 체포할 수 있었다.
두 사건의 의인들이 한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있는 공공장소에서 폭행을 할 수 있는 건 방관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주로 저항할 힘이 부족한 노약자를 대상으로 겁박하고 위해를 가하며,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리라는 망상으로 만행을 저지르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폭행이 시작될 때, 주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범인에게 대항한다면 폭행이 계속되진 않을 거다. 폭력범을 제압할 상황이 아니라면 함께 거세게 소리라도 질러 제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 사람 혼자 그런 무자비한 폭력범에게 맞설 수는 없겠지만, 여럿이 힘을 모으면 파렴치한 폭력범도 그렇게 날뛰지는 못할 테니 말이다.
아울러 타인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위협을 가하는 자들은 엄벌에 처해야만 한다. 대체 그들은 무슨 권리로, 어떤 이유로 낯 모르는 사람들에게 주먹과 흉기를 휘두른단 말인가!
그런 범인들에게는 폭력의 대가가 얼마나 무서운지, 폭행을 당하는 사람의 고통과 그런 무작스러운 상황을 보면서 공포와 분노를 느꼈을 주위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큰 상처를 준 것인지 깨닫게 해야 한다.
나는 몇 년 전에 이곳 파리에서 오토바이 2인조에게 사고를 당하는 일을 겪었다. 여름 한낮이라 길에 사람이 많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았다.
여름방학이라 고등학교 학생들이 문화예술 체험을 위해 파리에 와 있었다. 오전에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하고 점심식사를 한 직후였다. 대부분은 식당 앞에서 아직 나오지 않은 일행을 기다렸는데, 몇몇 학생들이 먼저 길 끝까지 걸어가 있었다.
그때 오토바이 굉음이 들렸다. 멀리 서 있는 여학생들 주위로 오토바이가 계속 맴도는 게 보였다. 심상치 않은 상황이라 나는 달려가서 학생들에게 위험하니까 보도 위로 올라가라고 당부하면서 학생들을 보호했다. 내가 오토바이가 다가오지 못하도록 학생들 앞으로 막아서자 여학생들 주위를 뱅뱅 돌며 위협하던 오토바이는 도망가듯 자취를 감췄다.
잠시 후 몇 미터 앞에서 우리가 탈 버스가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이 한 사람씩 버스에 오르는 것을 보고 있을 때, 강한 힘이 어깨 뒤에서 잡아당기는 걸 느꼈다. 나는 그 힘에 이끌려 붕 떴다가 뒤로 끌려가기 시작했다. 여고생들 가방을 뺏으려고 그들 주위를 돌던 범인들이 그걸 제지하는 내게 앙심을 품고 자리를 뜬 체하다 되돌아와 나를 범행대상으로 한 것이다.
나중에 입원실에 병문안을 오신 분들이나 염려해주신 많은 분들은 안타까운 마음에 “그냥 가방을 던져주지 그랬느냐?”라고 말했지만 그건 상황을 잘 몰라서 하는 말일뿐이었다.
당시 너무 갑작스레 일어난 일이라 가방을 던져주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었다. 더구나 그들이 상상하듯이 가방을 손에 든 상태가 아니었고, 짧고 굵은 손잡이 자체를 어깨에 메는 가방이라 오른쪽 어깨에 꽉 끼어 있는 상태였다.
뒤쪽에서 가방에 엄청난 힘이 가해지는 순간 허공에 잠시 올랐다가 바닥에 떨어졌다. 그릉그릉 기괴한 악마가 토해내는 소리를 내며 달리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은 범인은 가방 손잡이를 잡고서 가방을 빼려고 했지만 어깨에 끼인 가방은 빠지지 않았다.
오른쪽 어깨는 들려 누운 채로 왼쪽 어깨와 등, 온몸은 아스팔트와 돌길을 훑으며 바닥에 끌려갔다. 그런 와중에도 머리는 다치면 안 된다는 생각에 머리를 들었으므로 내 앞쪽에 서 있는 사람들 모습을 대부분 볼 수 있었다.
처음에 끌려가기 시작할 때 눈에 보인 건 교통순경 두 명이었다. 그들은 순간적으로 일어난 상황에 놀랐는지 제자리에서 곤봉만 휘두를 뿐이었다. 그 옆에 여학생들과 갑자기 모여든 프랑스 사람들 모습도 보였다. 무척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나는 그때 그들이 달려와서 나를 구해줄 것 같은 희망에 프랑스어로 “도와주세요!”라고 처절하게 외쳤다.
그러나 몇 번을 외쳐 봐도 그들과 점점 거리가 멀어지는데도 아무도 뛰어오지 않았다. 누군가가 앞길을 막아 오토바이를 세우기를 바랐지만 오토바이는 아예 지그재그로 달리며 나를 길 양쪽에 세워 둔 차량들에 부딪히게 했다.
생각해 보면 그날 그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은 비겁한 방관자들이었다. 대체적으로 프랑스에서 오토바이 강도를 하는 범인들이 타는 오토바이는 작고 바퀴도 얇은 편이다. 성능도 그리 좋지 않다. 그런 오토바이가 48킬로의 여자를 매달고 지그재그로 간다면 빠르게 달리지 않았음에도 누구 하나 제지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름이라 원피스에 얇은 하얀 스웨터를 입고 스타킹을 신고 있던 나는 길바닥에 뒤로 끌려가며 피투성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머리를 다치지 않아야겠다고 안간힘을 쓰며 고개만 든 채 바라본 하늘은 유난히 파랗고 희디흰 뭉게구름은 평화롭게 떠있었다.
온몸의 살갗이 바닥에 긁히면서 벗겨지고 계속해서 차량에 ‘퉁퉁’ 내 다리가 부딪히는데도 아픈 감각보다는 ‘세상이 정지했구나!’ ‘아무도 없구나!’란 생각만 들었다. 백 미터 정도 길이었는데 신기하게도 그 짧은 시간 동안 수많은 생각과 그리운 얼굴들이 스쳐갔다. 거미줄에 걸린 나비처럼 빠져나올 수 없는 절망 속에서도 끊임없이 생각했다.
경직되어 있던 몸에 점차 힘이 빠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 어느 순간 이대로 정신을 잃으면 절대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온몸은 피투성이가 된 상황이지만 내가 의식을 잃어 머리가 바닥에 부딪히면 결국 범인들은 승리감을 맛보며 쾌재를 부를 것이고 죄책감은커녕 수많은 사람들에게 같은 범행을 저지를 것이란 생각을 했다.
아무도 구해주지 않을 거란 절망이 들면서 내가 나를 지켜야겠다는 마음이었다. 그건 범인들에 대한 나의 마지막 저항이었다. 용기였다. 내가 어쩔 수 없이 죽는 한이 있어도 그들에게 굴복하는 건 나를 더 비참하고 견딜 수 없이 만들 것이므로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머리가 바닥에 닿지 않도록 버티고 있었다. 결코 정신을 놓거나 기절하지 않았다. 그건 세상 사람들이 나를 어리석다거나 미련하다 비웃는다 해도 나 자신을 지키려는 내 의지였다.
몇 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프랑스어로 “그만 해, 멈춰!”라고 외치는 여자 목소리가 들리고 반대편 방향에서 사람들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도 희미하게 들렸다.
그러자 오토바이가 갑자기 멈추고 뒷자리에 앉아 짧은 가방 손잡이를 잡고 있던 범인이 내려서서 길바닥에 누운 나를 내려다봤다. 그러더니 한 발을 들어 나를 밟으려는 시늉을 하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멈칫하며 황급히 오토바이를 타고 달아나 버렸다.
오토바이 소리가 들리지 않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누군가가 다가와 앉아 피투성이가 된 나를 안아 무릎에 기대게 했다. 그는 “당신은 구조됐으니 이제 안전해요! 구급차가 올 겁니다. 힘내세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거리 양쪽 건물 베란다와 창문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내 주위로도 언제 왔는지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모여 있었다. 잠시 후엔 곤봉을 휘두르기만 하고 뒤따라오지 않은 채 보고 있던 순경들도 달려왔다. 누구인지도 모르는 착한 사람 무릎과 팔에 머리를 얹고 피투성이가 되어 길에 누운 채로 잃어버리지 않은 가방 안에 전화기를 꺼내 달라고 했다.
잠시 후 나는 도착한 구급차에 실려 시테 섬에 있는 오텔 디유 병원 응급실에서 응급처치와 치료를 받았다. 그날부터 견딜 수 없는 고통과 괴로움은 시작되었다. 그것은 1년 동안이나 이어졌고 사건이 마무리되는 데는 무려 2년이 걸렸다.
사고가 있은 지 며칠 후, 특수 수사대 소속 형사 두 명이 병실로 찾아왔다. 그들은 여러 증인들이 한 증언을 갖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했다. 기억나는 대로 상황을 말해 달라며 조서를 꾸몄고 사건 당시 입었던 누더기가 된 원피스와 옷 등도 사진을 찍어갔다.
그중 한 사람은 건장한 여자 형사였는데, 조서를 작성한 후에도 자리를 뜨지 않고 병실에 누워있는 나를 찬찬히 살펴보며 내내 말이 없었다. 내가 그녀를 바라봤을 때, 그녀 눈엔 눈물이 어려 있었다. 어깨부터 두 발까지 붕대를 감고 있는 나를 한참 동안 응시하던 그녀는 큰 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범인을 꼭 잡을 거니까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힘들겠지만 잘 견뎌내시고, 어서 회복하길 바랍니다."라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하면서 나를 위로했다. 이후로도 그 두 사람은 나를 여러 번 방문해서 용기를 주었다. 그런 든든한 형사들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되었다.
몇 달이 흐르고 퇴원 후 집에서 치료를 받던 시기에 범인들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걷지 못하는 나를 위해 또 다른 여자 형사들이 차를 갖고 와서 경찰서로 함께 갔다. 제대로 걸을 수 없어 목발을 짚은 상태로 거울을 통해 범인들을 가려내는 작업에 참여했다.
두 번에 걸쳐서 했는데 각각 번호표를 단 여러 명 중에서 얼굴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그중 한 명에게 눈길이 가는 순간 전율이 일었지만 담당 형사들에게는 그가 범인인지 확신할 수 없다는 말을 했다.
사실 사건이 나던 순간, 나는 범인들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나보다는 이미 한국으로 돌아간 여학생들이 범인들을 가까이서 봤기 때문이다. 걱정하는 내게 담당 형사들은 그날 프랑스 목격자와 다른 피해자들이 확실하게 범인을 지목했으므로 아무 염려하지 말라고 나를 격려했다.
겨울 봄 지나 여름까지 수차례 걸쳐 파리 법원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 피해자인 내게 재판 일정과 법정에 참석할지 여부를 알리는 것들이었다. 참석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법원 소속 병원에서 편지를 보냈다. 다른 피해자들이 많고 사건 당시 내 병원 기록 등이 있으니 원하지 않으면 굳이 내가 법정에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대신 사건 이후 내 건강상태와 후유증 등 전문의 소견으로 대신해야 하니, 법원 소속 병원에 와 달라고 해서 나는 그 방법을 택했다. 방관하는 사람들도 많지만, 이렇게 세상 곳곳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위해 일하고 최선을 다해 돕는 사람들 또한 무수히 많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이따금 사고 당일이 떠오를 때가 있는데, 지금도 소름 끼치도록 끔찍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때 내가 다치지 않고 여학생 중 한 명이 다쳤더라면 나는 학생을 돕지 못한 죄책감으로 더욱 괴로워했을 것이다.
아울러 통계로만 알고 있던 프랑스 병원의 실태를 알게 되었고 병원에서 일하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이기적이고 타성에 젖은 인간 군상들도 보았다. 대부분 좋은 분들이었으나 상식 밖의 사람들도 적잖이 있었다. 숱한 어려움과 억울함을 겪으면서 내가 병원에 입원하거나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결코 알지 못했을 황당한 상황들을 체험했다.
무엇보다 육신의 고통이 정신을 장악할 수 있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다. 깊은 상처가 아물고 낫기만 한다면 최선을 다해 더욱 열심히 살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 두 발과 두 다리로 걸을 수만 있다면 모든 것에 감사하리라는 간절한 기도의 나날이었다.
시테 섬, 노트르담 대성당이 보이는 오텔 디유 병실과 코샹 병원, 그리고 17세기에 만들어진 생 루이 병원에 입원했던 시기에 나는 ‘새로운 나’로 거듭날 순간을 꿈꾸며 아픔을 참아냈다.
수세기 동안 병자들이 거쳐 갔을 병원, 웅장한 석회암으로 지어진 연륜 있는 오텔 디유 병실 안에서 바라다보던 노트르담 대성당과 아침저녁으로 들리던 종소리는 은은하다 못해 처절한 울림으로 마음과 몸속으로 퍼져 들었다.
여름 지나 11월에 다시 입원한 생 루이 병원은 병원이라기보다 고성 같았다. 1600년에 지어져 병원 안에 미로 같이 이어진 길과 담벼락. 고혹적인 단풍나무가 현란하던 생 루이 병원, 그곳에 색색의 낙엽으로 채워진 뜨락을 잊을 수 없다.
프랑스 병원 입원실은 저녁 8시 이후에는 가족이나 보호자가 환자와 지낼 수 없는 규정이 있어 온밤 내내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았다. 창밖으로 새벽마다 보이던 검푸른 하늘과 총총하던 별빛은 4백 년 된 병원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내게 환하고 따뜻한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런 아픔을 이겨낸 지금 나는 사고를 겪기 전보다 강해진 것을 느낀다. 사고 직후엔 오토바이 소리를 듣거나 범인처럼 생긴 얼굴이나 인종만 봐도 전율할 정도로 지극히 나약했지만, 혹독한 시련기를 견뎌낸 다음부터는 두려움이 점차로 사라져 이제는 어떤 경우에라도 어려운 상황에 놓인 사람들을 도울 수 있을 용기마저 생겼다.
뉴스에 물속에 빠진 사람을 구하려는 사람, 지하철에서 철로에 떨어진 사람을 구하는 사람, 고층에서 떨어지는 아이를 받아내는 사람, 소매치기나 강도를 당하는 사람을 도우려는 사람, 아이를 유괴하려는 범인을 쫓아가 아이를 구해내는 사람들, 이루 열거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다는 기사가 실린다.
그 외에도 아픈 친구를 위해 정성을 모으는데 앞장서는 초등학생들이나 어려운 환경에 놓인 사람들과 독거노인을 찾아가 말벗이 되어주고, 음식 등을 준비해 주는 선량한 사람들 모두 훌륭하고 고마운 이들이다.
평화롭고 안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서는 나 혼자만의 이익과 안위에 급급하기보다는 약할 지라도 여러 명이 마음과 힘을 모아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놓인 사람을 돕고 구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다 보면 나쁜 짓을 하려는 악당들도 언제 어디에나 여러 힘이 뭉쳐져 자신들을 견제한다는 것을 알고 함부로 타인을 괴롭히고 위협하는 일이 줄어들 것이다.
방관은 범죄를 더 부추기는 행위에다 범죄와 다름없다는 인식으로 우리 스스로 힘을 모아 이 사회를 지켜내면 결국 나와 나를 둘러싼 가족과 친구, 동료와 이웃 모두가 평화롭고 안전하게 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