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의 완벽하고 세련된 조화 샹티이 성
코로나 19가 시작된 지 3년째로 접어든다. 정체된 삶! 시간은 빠르게 날아가는데, 통제된 상황은 어둔 터널 속에 계속해서 머물러 있다.
세계 모든 사람이 그렇겠지만 내 경우는 더욱 견디기 힘들다. 내가 가고 싶은 곳을 자유롭게 다니고, 프랑스와 유럽을 종횡무진하던 나로서는 그야말로 ‘날개 접은 새’처럼 숨죽인 채 지내는 생활이 이어지니 답답함을 넘어 가공할 공포에 떨고 있다.
처음엔 몇 달이면 끝나겠지 했는데 6개월이 지나 해가 바뀌어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다가 그렇게 또 한 해가 어이없이 흘러가 버렸다. 모든 계획이 유보되고, 진행하던 일들도 제자리에 동그마니 앉아 먼지가 뽀얗게 쌓여간다.
노천카페나 외식을 즐겨하던 내가 이제는 식사 초대장이 와도, 공짜로 음료와 브런치를 제공한다 해도 손사래 치며 거부한다. 바이러스가 뭔지! 비닐장갑을 끼고, 휴지를 겹으로 댄 마스크를 쓴 채, 마타하리처럼 선글라스로 얼굴 전체를 가리고 집 밖을 나서야만 안심이 되는 세상에 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투명한 유리상자 속에 갇혀 있는 듯한 암담함과 숨 막히는 괴로움을 견디기 위해 해결책을 찾아보았다. 그 가운데 하나가 스트레스가 쌓이는 순간이나 자투리 시간에 예전에 갔던 곳들을 찬찬히 기억으로 그려보는 방법이다. 마음으로 그리운 곳을, 인상적인 풍경을 되찾아 다니면서 다가올 찬란한 미래를 함께 펼쳐보니 옅게나마 희망의 문이 보이는 느낌이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지역 중에서 며칠 전부터 프랑스의 샹티이(Chantilly) 성이 오롯이 떠오른다. 그 이유로는 워낙 좋아했던 곳이기도 하고, 온통 씁쓸한 뉴스가 귓가를 채워 입맛까지 떫고 쓴 요즘에는 샹티이 크림 듬뿍 넣은 슈크림과 샹티이 크림을 몽블랑처럼 얹은 뜨거운 음료를 몇 잔이고 마시고 싶기 때문이다.
부드럽고 달콤한 샹티이 크림은 샹티이 성에서 처음 시작되었다.
세상 사람들이 즐겨 먹는 샹티이 크림은 바로 샹티이 성에서 시작되었다. 세계적으로 명성 높은 셰프들 중에 특히 17세기 프랑스에서 능력을 인정받았던 프랑수아 바텔이 샹티이에서 만들어냈기에 성의 이름과 같이 샹티이 크림이 되었다.
바텔뿐만 아니라 달르와요 등 재능 있고 실력 있는 셰프들이 샹티이 성에서 활약했다. 이 시대의 셰프들은 가히 마에스트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식재료로 요리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음식을 담는 그릇들과 식탁 세팅과 장식은 물론 공연 기획에 이르기까지 음식과 관련한 모든 것들을 조화롭게 이뤄내는 역할까지 한 것이다.
지금도 샹티이 성에는 바텔과 달르와요 그리고 각 시대 셰프들이 기획했던 모든 것과 다양한 요리기구와 식기들이 소장되어 있다. 때때로 기획 전시를 할 때면 그곳을 찾은 관람객들은 17세기와 18세기에 실력을 발휘했던 셰프들의 탁월한 재능을 보며 감탄한다. 동시에 그들의 독특한 삶과 사랑이야기가 샹티이 성 곳곳에 실타래처럼 놓여있기에 그것을 한 올 한 올 풀어내다 보면 어느새 가슴속 가득 감동이 차오르게 된다.
이처럼 프랑스 샹티이 성은 영화보다 더 극적인 이야기를 품고 있는 성이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성채와 정원, 주위의 드넓은 숲으로 자신의 개성을 한껏 보여준다.
파리에서 A1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 8번 출구로 빠져나와 샹티이를 가리키는 표지판을 보면서 30여분 가다 보면 샹티이 숲에 이르고 숲에서 빠져나오자마자 바로 성채가 모습을 나타낸다. 중간에 924번 지방도로와 16번 국도를 타고 달리면서 보는 풍경은 전형적인 고즈넉한 프랑스 전원풍경이다.
샹티이 전체 면적은 10,684 헥타, 숲의 넓이는 그 반이 넘는 6,300 헥타에 달하는 녹지대다. 샹티이 상징인 성안으로 들어가는 진입로에는 양옆으로 잔디밭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다.
샹티이 성 관문인 정문 입구 운하 쪽에서 바라본 샹티이 성.
성문에 서면 묵직하면서도 세련된 성채와 조경예술이 돋보이는 정원, 그리고 성을 감싸고도는 운하가 시야에 들어온다. 또한 이곳에서 5킬로미터 거리에 말들이 펼치는 묘기와 공연을 생생히 관람할 수 있는 기마 박물관(Musée vivant du Cheval)이 있다.
성을 에둘러 흐르는 운하 건너편으로는 마구간이자 마상 경기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레 그랑 제퀴리가 자리하고 있다.
세상 사람들이 좋아하는 영화 007 제임스 본드 시리즈 중에서 1985년 로저 무어가 주연한 <어 뷰 투 어 킬(A VIEW TO A KILL)>에서 관객들의 시선을 끄는 공간이 있다. 그곳이 바로 샹티이 성과 인접해 있는 레 그랑 제퀴리다.
종종 영화의 무대가 된 레 그랑 제퀴리(Les Grandes Écuries).
다른 지역의 경마장이나 마구간과는 확연히 다른 이곳에서는 때때로 승마 경기도 펼쳐지고 각기 다른 종의 말들과 조랑말들이 펼치는 마상공연을 관람할 수 있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
성문에서 콩데 박물관(Chateau Musée Condé)까지는 300미터, 지금은 박물관으로 단장된 성을 찾는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이곳의 역사도 그리 만만치 않다. 중세로 거슬러 올라가 14세기경에 샹티이는 상리스에 속해 있었고, 1358년 농민봉기로 인해 피폐해진 이곳을 기욤 부테이가 피에르 도르쥬망에게 넘겼다.
그에 의해 현재 그랑 샤토의 모체가 된 성채가 지어졌으며, 한창 신교화 구교와의 대립이 치열하던 1560년경에 이르러 안느 드 몽모랑시가 프티 샤토를 지으면서 잘 정비하고 단장시켰다. 그랑 샤토 정문 앞에 우뚝 서 있는 기마상이 바로 처음 샹티이 성을 지은 안느 드 몽모랑시다.
본격적으로 성과 정원을 현재의 모습으로 변모시킨 장본인은 그랑 콩데다. 그는 베르사유의 정원을 설계했던 르 노트르로 하여금 샹티이 성과 정원을 크게 변화시켰고, 역시 베르사유 궁 건축을 총괄했던 망싸르가 두 채의 파비용을 지으면서 샹티이 성과 일대는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가을의 정취에 물든 샹티이 성.
특히 그랑 콩데는 이 성을 종합예술의 공간으로 제공했다. 17세기를 풍미하던 우화작가 라 퐁텐느, 라 브뤼에르, 보쉬에, 마담 라 파이예트, 마담 드 세비녜도 이 성을 자주 찾아 예술의 꽃을 피웠다. 한때 공연 금지령까지 내려졌던 그 유명한 희곡, 극작가 몰리에르 작품 타르튀프도 베르사유보다 먼저 이곳에서 상연되었다.
콩데 박물관과 전람회장 같은 정원
그렇게 번성했던 샹티이 성 주변은 프랑스 대혁명 때는 거의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지만 다시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르네상스 풍으로 지어진 고성과 정원을 복원시키려는 이들의 부단한 열정과 노력 덕분이었다.
그들은 17세기 조경예술의 천재 작가 르 노트르가 설계해서 만든 프랑스식 정원과 영국식 정원, 다양한 형태의 운하 그리고 베르사유 프티 트리아농에 있는 매력적인 초가의 모델이 된 초가집들까지 완벽하게 되살려놓았다.
샹티이 성과 정원을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수많은 조각상들은 이곳의 운치를 더해준다. 넓은 정원 곳곳에 자리한 석조와 청동 조형물들은 어찌나 섬세하고 정교하게 만들어졌는지 때때로 조형물들을 바라볼 때마다 마치 그들이 성을 수호하면서 서로 대화를 나누며 살아 움직이는 듯한 기분마저 든다.
운하 위에 걸쳐 있는 다리, 다리는 문의 역할을 하며 다리 아래로는 물길이 나 있다. 필요할 때는 견고한 쇠줄을 감아 다리를 올려 외부로부터 차단하기도 하고, 개방할 때는 다리를 내려 외부 사람들이 성 안을 드나들 수 있도록 해 놓았다.
성안으로 들어가면 그랑 샤토와 프티 샤토로 나뉘는데 그랑 샤토는 자유롭게 전시실을 다니며 내부를 둘러볼 수 있다. 15세기에서 19세기에 이르는 진귀한 회화작품들이 소장되어 있으며 특히 르네상스의 거장 라파엘로를 비롯한 이탈리아 작가들의 작품들이 눈길을 끄는 관계로 유서 깊은 르네상스 미술관을 방불케 한다.
그랑 샤토(Grand Château)에 전시되고 있는 알프레히트 뒤러의 <두 여인>, 장 끌루에 <앙리 2세 어린시절 초상>, 라파엘로 <로레타 마돈나>.
아울러 에콜 프랑세즈의 그림들을 감상할 수 있으며 프랑수아 1세부터 앙리 2세, 샤를르 9세 그리고 앙리 2세의 왕비이며 바르텔레미 종교 분열, 학살 사건의 주동자였던 카트린느 드 메디치 등, 왕실 사람들의 초상화는 물론 상티이를 지키고 다듬어온 역대 성주들과 가문에 속한 이들의 초상화도 볼 수 있다.
그랑 샤토에서 명화 감상을 마치고 프티 샤토를 들어가기 위해서는 샹티이 성을 설명해주는 프랑스 문화해설사를 기다려야 한다. 해설사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내부를 둘러보면 각 방의 특성과 용도를 더 잘 알게 되고, 그 시대를 살던 사람들의 모습이 생생한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샹티이 성 내부 각 방들은 주인공의 내력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샹티이 성에서 가장 인상적이고 압권으로 손꼽히는 것은 비블리오테크, 바로 서재다. 이곳은 그야말로 진귀한 책들로 채워진 보물 도서관이다. 어떻게 이런 책을 만들었을까? 감탄이 절로 나오는 책들, 붓과 펜으로 한 자 한 자 정성스레 써 내려간 필사본, 화려한 빛깔과 금박으로 장식한 장정의 고귀한 복음서 수사본들이 가득한 보물창고다.
15,000종의 고서 및 복음서 수사본이 소장된 샹티이 도서관. 림부르크 형제가 제작한 <베리 공작> 채색삽화들(왼쪽 및 오른쪽 삽화)와 황도십이궁 채색삽화(가운데).
이곳에는 책을 읽을 때 필요한 나무 받침대나 책과 관련한 각종 기구들 또한 함께 소장되어 있다. 이 모든 책들은 현재 프랑스 학회가 소유하고 있다.
1830년 7월 혁명을 일으켰던 루이 필립의 다섯 아들 중 막내였던 앙리 도말은 성의 마지막 소유주였다. 그는 샹티이 성과 정원은 물론 모든 것을 국가에 기증함으로써 도서관은 프랑스 학회가 관리하게 된 것이다.
샹티이 성을 국가에 기증한 앙리 도말(Henri d'Aumale)은 성채의 마지막 주인공이었던 인물이다.
샹티이 성에 대한 이야기는 무궁무진하다. 그중에서 17세기 전설적인 프랑수아 바텔과 그랑 콩데 앙리 도말 세 사람이 떠오른다.
앙리 도말이 그가 가진 모든 것을 국가에 기증함으로써 일반인들이 샹티이 성을 편안하고 친근하게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니 그의 양심에 감사한다.
바텔과 그랑 콩데는 내가 이미 펴낸 <그가 사랑한 베르사유>(도서출판 샘터)에서 두 거장의 삶을 자세하게 서술한 바 있다. 특히 프랑수아 바텔은 그와 관련한 일화들이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일반적인 요리사와는 다르다.
프랑수아 바텔은 17세기 태양왕 루이 14세 때 재무총감이었던 니콜라 푸케의 성, 보 르 비콩트를 거쳐 루이 14세의 친척인 그랑 콩데의 샹티이에서 탁월한 재능을 과시했다. 그는 요리뿐만 아니라 공연 기획까지도 진두지휘했다.
그는 기획한 공연 주제와 어우러지게 메뉴를 짜서 식재료와 소스 등을 선정하고 요리했다. 음식을 먹고 마시는 것도 공연의 일부이므로 느끼고 맛보며 품격 있게 즐길 수 있도록 조화롭고 섬세하게 장식했다.
마지막으로 샹티이 성을 바라보며 그랑 콩데의 담대함과 세상을 꿰뚫어 보는 혜안에 감탄한다. 특히 권력의 유혹에 휘둘리지 않고 정도를 지킨 그의 중심 지키기 일화를 정치하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는 대다수의 왕손들과 무리들이 그를 왕으로 추대하고자 했음에도 흔들리지 않고 올바른 판단을 해서 끔찍한 상황으로 치닫던 2차 프롱드난을 평화롭게 종식시킬 수 있게 했다.
그랑 콩데는 태양왕이라 불리는 루이 14세보다 열일곱 살 많은 친척이며 서열이 높은 데다 덕망 높은 왕가의 혈통을 받아 사람들로부터 주목받던 인물이다. 루이 13세가 1643년 세상을 떠나고 만 다섯 살인 루이 14세가 왕위를 이어받자 혼란이 이어진다.
대비 안느 도트리쉬 섭정이 시작된 후 프랑스에는 1, 2차 프롱드의 난이 일어난다. 1차는 법관들의 난이며, 2차는 왕가의 핏줄들, 공주, 옹주를 포함한 왕자들의 반란이었다. 왕손들은 능력과 재능 그리고 덕망을 겸비한 그랑 콩데를 왕으로 추대하며 그들 뜻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으나 그랑 콩데가 반대한다.
그는 왕좌가 눈앞에 놓여있음에도 권력을 탐하지 않았다. 양심과 이성을 지닌 그랑 콩데는 ‘비록 어린 왕일지라도 적통은 루이이므로 프랑스의 왕은 루이’라고 천명하고는 왕족과 귀족들을 설득한다. 더욱 놀라운 것은 루이 14세와 도전적이고도 명쾌한 담판을 지은 것인데, 쉽게 말하자면 반란에 가담한 왕족과 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거나 탄압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아낸 것이다.
루이 14세도 그랑 콩데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이고 약속을 이행함과 동시에 한때 자신을 제거하려 했던 모든 세력이 다시는 그런 쿠데타를 일으키지 못하도록 쐐기를 박았다. 상징적인 퍼포먼스일 수도 있겠으나 그랑 콩데를 포함한 모든 왕족과 귀족이 루이 14세 앞에서 허리 굽혀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었다. 이로써 루이 14세는 1661년부터 섭정의 막을 내리고, 절대왕권을 표방한다.
샹티이 성 앞에는 질 게랭이 조각한 작품이 눈길을 끈다. 루이 14세가 프롱드 난을 완전히 종식시키고 당당하게 선 모습의 조형물이다.
프롱드 난을 종식시킨 루이 14세, 질 게랭 작품, 샹티이 성.
이후에 그랑 콩데는 루이 14세에게 예술로써 승부하자는 선의의 제안을 하면서 샹티이와 베르사유는 종합예술의 공간으로써 거듭난다. 건축가 망싸르와 정원 조경의 르 노트르, 화가 르 브랭이 두 곳을 넘나들며 유럽 최고의 반열에 오르게 하고, 문학과 음악, 연극과 미장센. 회화와 조각, 장식예술 등이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룬다.
능력 있고, 재능을 겸비한 그랑 콩데가 사사로운 정과 권력욕에 흔들리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위해 통 큰 결단력과 포용력 그리고 관대함을 보여줌으로써 루이 14세는 물론 목표와 정책을 달리하는 상대편 사람들에게도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 지혜롭게 정치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잘 알게 해 주는 계기가 되었다.
베르사유 궁전이 태양왕 루이 14세가 심혈을 기울여 창조해낸 종합예술이 펼쳐지던 공간이었듯이, 샹티이 성은 그랑 콩데가 루이 14세와 선의의 경쟁을 하면서 정성스레 일궈낸 위대하면서도 열려있는 문화예술의 한마당이었다.
샹티이를 회상할 때는 한 곳 한 곳 마주 하듯이 황홀하게 떠올랐는데 막상 지금은 갈 수 없는 곳이라 생각하니 불과 몇 해전 일들인데도 아득하게 느껴지며 더욱 그리워진다.
2019년 12월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이 있을지 예측하지 못했었다. 이 기막힌 상황이 하루빨리 종식되어 다시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길 날마다 기도한다.
기억을 되살리며 마음으로 그리는 풍경도 괜찮지만 이제는 맑고 신선한 기운을 느끼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예전처럼 바이러스 없는 세상에서 집 앞 소박한 정원과 길이라도 마음 편하게 거닐고 싶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