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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문정 Dec 31. 2021

오랑쥬와 샤토뇌프 뒤 파프


강이 흐르고 나지막한 산이 줄곧 함께 하는 풍경이 정겹다. 절기로는 겨울의 문에 이미 들어섰지만 나는 훈향을 찾아 아직은 따뜻함이 남아있을 프로방스로 향했다.


남불의 깊어 가는 늦가을, 들판엔 수확을 이미 끝낸 키 작은 포도나무들이 고혹적인 빛깔을 뿜어내고 있었다. 멀리서 보면 흙빛 같기도 하고 가까이서 보면 포도주로 물들인 것처럼 붉은 자줏빛이 감도는 것이 현란하기까지 하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포도나무만큼이나 많은 올리브 나무들은 쑥 빛과 갈색으로 어우러져 소박하게 서 있다.


프로방스의 고혹적인 늦가을 정취


프로방스의 어느 지역에서도 고대 로마의 유적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로마 유적이야 이탈리아에서 충분히 볼 수 있겠지만, 프랑스에서 보는 로마 유적들은 전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로마인들은 정복지였을 이 지역에 수 십 년, 혹은 대를 이어가며 건축물과 다리 그리고 수로를 만들었다.


그와 같은 유적들이 몇 천년이 지난 후에도 그 웅장함과 견고함을 과시하며 우리를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유적들은 2천 년이란 긴 세월과 외세의 침략에 의해 마모되고 파괴되긴 했지만 다른 도시에 비해 비교적 잘 보존된 곳이 오랑쥬다.


오랑쥬(Orange) 고대 원형극장


오랑쥬는 프로방스의 관문이라고도 불리는 곳이다. 고대 로마시대 유적이 있는 도시로 유명할 뿐만 아니라 맏물 과일과 신선한 야채 등을 거래하는 활발한 상업도시로 알려져 있고, 예전에도 그랬듯이 현재도 군사기지로서 한몫을 하고 있다.


오랑쥬가 군사도시임을 일러주는 미라쥬 전투기가 도심을 향한 길목에 전시되어 있다.


오랑쥬는 고대 극장, 로마 황제 카이사르에게 헌정한 기념 아치인 개선문, 공중목욕탕 그리고 원형경기장 등 로마 시대 유적의 보고다.


그 이유는 기원전 52년부터 로마제국이 현재 프랑스(갈리아)로 와서 점령하고, 기원후 360년 로마인 율리아누스가 로마로부터 통치를 거부하고 독립을 이뤄 내기까지 4백여 년 동안 로마의 흔적 도처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로마인들은 프랑스인(당시는 골루아 인)인들에게 건축은 물론이거니와 도로와 수로, 포도주 담그는 기술 등 다양한 접근방식으로 융화정책을 폈다.


대체적으로 식민 통치를 받은 나라나 도시 사람들은 침략자의 흔적을 말끔히 제거하고, 그런 기억조차 완전히 지우려고 하는 것이 통상적인 일이다. 그 시대와 관련된 건축물이나 조형물을 모조리  없애야만 그들로부터 당했던 아픔이나 치욕 잊고  새롭게 시작할 수 있는 것마냥 무조건 깨고 부수며 밀어버린다.


그러나 프랑스 사람들은 식민통치 또한 역사의 일부요, 그 유적들 역시 인류가 지켜야 할 문화유산이라 생각하며 그대로 보존한다. 파리 소르본느 대학 인근에 로마 식민 통치 시대 때 만들어진 공중목욕탕 역시 형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들 포용력 있는 생각에 공감은 하면서도 과연 식민통치 때 만들어진 조형물들을 그들처럼 담대하게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을지에 대한 회의가 든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부수고 없애 버리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므로 우리는 좀 더 냉철하게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겠다.


오랑쥬에 진입하면 마을 북쪽에 개선문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아치는 높이 18미터, 폭 19미터, 두께가 8미터로 그리 크지는 않지만 기원전 49년에 축조된 것이라는 걸 감안하면 사뭇 느낌이 달라진다.


오랑쥬 개선문


이 개선문은 특이하게도 세 개의 아치가 있고, 카이사르의 전승을 기념하는 장면들이 새겨져 있다. 개선문 주위에는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가 늘어서 있어 오랑쥬의 관문임을 한눈에 알 수 있게 해 준다.


개선문에서 빅토르 위고 거리로 계속 걸어가다 보면 오랑쥬의 중심가인 구시가지와 마주치게 된다. 중심가라 해도 워낙 작은 마을이기 때문에 그리 북적거리지는 않는다. 17세기에 지어진 종루가 있는 시청 사 주위와 노트르담 대성당 인근은 고즈넉해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산책로이다.


특히나 어느 곳을 걸어도 키가 큰 아름드리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든든한 친구들처럼 함께 따라오며 곁을 지켜주기에 더욱 매력적인 프로방스의 정취를 느낄 수 있다.


생 유트로프 언덕을 향해 가면 오랑쥬가 자랑하는 고대 극장이 보인다. 언덕을 울타리처럼 등지고 서 있는 이 고대 극장은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때 지어진 것으로 거대한 돌벽은 길이 103미터, 높이 36미터에 달한다.


오랑쥬 고대 원형극장 모습.


네덜란드와 분쟁이 극에 달할 때 그 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이곳을 황폐화시킨 루이 14세조차도 왕국의 가장 아름다운 성벽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다.


고대 극장은 사실 유적이 아닌 살아있는 공간이다. 예전에는 만천 여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7천여 명 정도로 축소되었다.


1869년에 특별히 합창할 수 있는 무대를 다시 만들고, 1950년에는 중앙 벽면의 니슈(움푹 들어간 곳)에 355미터나 되는 아우구스투스 상을 재건축함으로써 대중에게 보다 더 친근하게 다가가게 만들었다.


객석은 강한 햇빛으로부터 관객을 보호할 수 있도록 설계되었고, 무대는 나무판자로, 벽면은 대리석과 스터코, 모자이크와 간격을 둔 돌출 기둥으로 장식했다. 이곳 모든 것이 견고하게 건축되어 오늘날에도 오페라 등 음악회와 각종 행사가 개최되고 있다.


세계적인 마에스트로 정명훈 님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던 오랑쥬 원형극장 무대.


2천여 년이란 긴 시간을 품고 있는 고대 극장의 돌 벽을 바라보기만 해도 각 시대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훑고 지나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천 년 이상을 버텨왔을 돌 하나하나에조차 점처럼 박혀 있 역사의 흥망성쇠가 얼기설기 얽혀 쌓여 있기에 이 세상 백 년도 채 머물못하는 우리네 인간의 짧은 인생에 옷깃을 여미며 고개를 숙이게 된다.


오랑쥬에 이어 도시 인근에 위치한 ‘샤토네프 뒤 파프(Châteauneuf du Pape)’ 포도밭을 찾아간다. 이미 프로방스 지역에서 최고의 포도주로 인정받은 샤토 네프 뒤 파프의 포도밭은 풍경뿐만 아니라 이곳에서 맛보는 포도주 맛 또한 일품이다.


샤토뇌프 뒤 파프


중세시대에 아비뇽에 거주하던 교황들을 위해 포도농원을 조성한다. 그 포도밭에서 수확한 포도로 담근 술이 바로 오늘날까지도 명맥을 이어오는 향 깊은 샤토뇌프 뒤 파프 포도주다!


수목이 오래된 그르나슈(Grenache) 품종 포도나무에서 수확한 포도만을 엄선하여 정성스레 담근 술이어서 그런지 예사롭지 않은 맛과 함께 향기롭고 부드러우면서도 달콤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어떤 음식에도 잘 어울리는 샤토뇌프 뒤 파프 포도주는 오랜 전통과 그 특별한 탄생 배경 덕분에 품격을 지닌 것은 물론이고 명성 또한 높다.


프로방스 곳곳에 드리우는 햇살이 삶의 활기로 되살아나듯 과실즙이 숙성되어 묵직하고 향 깊은 포도주가 되는 동안 그 안에서 차오르는 오묘한 에너지는 세상과 사람을 만날 순간을 꿈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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