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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감동을 줍는 가을

by 이수


11월에 작은 기쁨 중 하나는 회사에서 나오는 생일 연차 1일을 어떻게 알차게 쓸 지 고민하는 일이다.

항상 수능 즈음이었던 11월 중순의 생일자는 ‘수능 한파’를 생일 세레모니처럼 맞이하였었는데, 이상 기온으로 역대급 따뜻했던 가을을 맞이했다.


11월 초 여름 나라로 여행을 다녀오고 나니, 은행잎이 노랗게 물들어 절정을 이루고 있었다. 그리하여 이번 연차 계획으로 정해진 ‘서울숲에서 가을 느끼기’. 우선 길게 치렁치렁 했던 머리를 잘랐고 가보고 싶었던 카페에서 맛있는 케이크와 커피를 먹었다. 귀여운 강아지 ‘순돌이’가 있는 독립서점에 들러, 한강 작가의 <흰>을 구매하고, 가을이 완연한 서울숲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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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 간 후 멀어져 오랜만에 오는 서울숲이었다. 낙엽이 떨어져 푹신한 카펫을 이룬 길을 사뿐히 걸으며, 각자의 속도대로 물들어 가는 나무들을 살펴본다. 노란색, 빨간색, 초록색, 갈색 이파리들을 고개 들어 찬찬히 바라보다, 시선을 내려 계절의 변화를 함께 목도하러 무리지어 있는 이들의 모습도 구경하고. 책을 읽을 적당한 벤치를 찾아 걸어가는데 흰 단발머리를 한 할머니가 나를 불러 세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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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진 하나 찍어줄 수 있을까요?”

흔쾌히 “네 그럼요!” 를 외치니 네 명의 할머니들이 포토스팟 앞으로 수줍게 자리 잡는다.


나는 사진 찍어 달라는 요청을 참 좋아한다. 관광지에 가면 나에게 찍어 달라고 누가 말해줬으면 하고 내심 바라기도 한다. (그래야 우리의 사진도 찍어 달라는 품앗이를 할 수 있기도 하고!)

찍어 달라는 요청을 받으면 기본적으로 가로, 세로로 여러 장 찍으며 다양한 포즈까지 요구하는데, 그럴 때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들의 순전한 귀여움과, 풀어지는 표정들을 보는 게 나만의 작은 장난이자 기쁨이다.


“아~너무 예뻐요, 자 이제 손하트!”


머리위로 큰 하트를 하는 분도 있고 둘이서 손으로 하트를 만든 분도 있다. 제각각의 하트들을 받으며 한바탕 사진찍기 세션이 마무리 된다.


돌려받은 휴대폰을 확인하는 할머니의 얼굴에 환한 웃음이 번진다.

“어우 너무 잘 찍어주셨다, 세상에!” 원하던 리액션이 나와 기쁘고 뿌듯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렸는데,

저 멀리서 연신 다시 한 번 감사 인사가 돌아온다.


“정말 너무 고마워요 아가씨~!” (아가씨라고 해주셔서 제가 더 감사합니다 흑흑..)


가을 풍경이 가장 아름다운 벤치를 찾아 자리 잡고, 서점에서 산 책을 읽었다. 책을 읽다 앞으로 강아지가 지나가면 흠모의 마음을 담아 훔쳐보고, 또 한참 책을 읽다 고개를 들어 주황빛의 풍경을 한참 구경하고. 충전의 시간을 충분히 보내고 바람이 차가워지는 것 같아 일어나려는데, 뒤쪽에 앉아있던 외국인 여성분이 다가와 말을 건다.


아~ 오늘 사진 찍어 달라는 요청이 많네, 실력 발휘 해볼까.


“#$%^*~?”


“Excuse me?”


다시 들어보니, 내 사진을 찍었다며 괜찮다면 보내주고 싶다는 내용이다.


단풍나무를 배경으로 독서를 하고 있는 모습. 카카오톡이 있다며 아이디를 물어 2장의 멋진 사진을 건네받았다. 서울숲에서 독서를 하는 내 모습이 좀 멋지다고 생각했던터라, 그 모습을 남겨준 것이 신기하고 반갑고 고마웠다. 할머님들 사진 찍어드린 친절을 보상 받았던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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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친구에게 들었던 일화가 생각났다. 도쿄 여행 때 잔돈이 모자라 옆 자리 한국인에게 현금을 빌리고 입금을 해드리겠다고 했는데, 그냥 선뜻 내어주시면서 ‘다음에 같은 상황이 왔을 때 누군가를 도와주시면 좋겠다’ 라고 했던 분이 있었다고. 그 다음으로 간 여행에서 실제로 식당 옆자리 한국 청년들에게 모자르는 현금을 내주면서 본인도 똑같은 말을 전했다고. 그 청년들도 어느 여행지에서 또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친절은 전염되고 나누어진다는 것을 느꼈던 하루, 외국인 분께 받은 사진으로 카카오톡 프로필을 바꾸면서 생각했다. 오늘 할머님들 프로필도 내가 찍어드린 사진으로 바뀌었으면 좋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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