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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업 Sep 26. 2023

퇴사하지 않았더라면

봄에 처음으로 스터디를 시작해 뜨거웠던 여름의 열기가 한 풀 꺾여가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고 있다는 건 곧 시험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이었다.


퇴사한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

이 기간 동안 나의 신분이 직장인에서 수험생으로 완전하게 자리 잡은 것은 물론, 내가 만나는 사람, 대화의 주제 등 많은 것들이 바뀌었다.


중요한 것은 좋은 일이든 슬픈 일이든 이 모든 일들은 내가 퇴사하지 않았으면 절대 겪지 못했을 일들이라는 것이다.




나는 '미생'이라는 드라마를 10번 가까이 봤을 정도로 좋아하는 드라마 중 하나다.

매번 볼 때마다 머릿속에 맴도는 장면들과 명대사들이 다르다.


그리고 이 때도 나는 미생의 한 장면에 꽂혔다.

영업 3팀의 김대리가 주재원 선발에 떨어지고, 중요하지 않은 일에만 몰두하는 오차장이 '자기 때문에 팀원의 앞길을 막는 것이 아닐까'하고 자책하는 장면이다.

이때 오차장은 늦은 시간까지 남아있는 장그래에게 이런 말을 남긴다.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바뀔 수 있다. 파리 뒤를 쫓으면 변소 주변이나 어슬렁 거릴 것이고, 꿀벌 뒤를 쫓으면 꽃밭을 거닐게 된다잖아"


스터디를 시작하고 약 5개월 간 많은 사람들이 나가고 들어오기를 반복했다.

내가 누군가의 뒤를 쫓는 입장은 아니었지만, 어떤 스터디원들을 만나느냐에 따라 나의 마음가짐도 바뀌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처음에는 누구를 만나든지 내가 열심히만 하면 크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이라도 함께 공부를 하다 보면 주위 사람들의 영향을 적지 않게 받게 된다.

불안함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할 때는 '이게 정말 가능한 건가'라는 생각을 하게 됐고, 포기하고 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나도 포기하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반면 최종적으로 남은 3명의 스터디원들과 함께 할 때는 정반대였다.

이들의 마인드는 굉장히 긍정적이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결국 자신들은 합격해 낼 것이라는 자신감이 느껴졌다.

그들이 대단해 보이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열심히 하면 나도 저들처럼 충분히 합격에 다가갈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단지 내 주위의 사람들만 바뀌었을 뿐이었다.

퇴사하고 항상 합격에 대한 불안함이 내 정신상태를 지배하고 있었는데, 이 3명을 만나고 나도 모르게 긍정적인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내가 수험기간을 2년으로 잡은 건 딱 2번의 시험으로 수험생활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첫 시험은 경험, 두 번째 시험은 실전


정말 1년 동안 내 모든 것을 갈아 넣으면 1년 만에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해 본 적은 있다.

하지만 당장 올해 합격을 바라보고 있는 스터디원의 실력을 보자마자 그런 생각은 사라졌다.

경제학에 대한 지식, 문제를 해석하는 감각, 답안을 컴팩트하게 정리하는 능력 등 모든 면에서 합격을 위한 준비가 된 사람이었다.

마치 출제자인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그와 나의 실력차이가 상당하다는 것에 좌절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처럼 공부하면 나도 충분히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원래는 합격의 길이 어디인지조차 몰랐다면, 이제는 어떤 길로 가야 할지가 파악이 된 느낌이었다.


나머지 2명의 스터디원들도 당장 올해의 합격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고 채워나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기본적인 마인드가 긍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이들의 실력도 눈에 띄게 향상되고 있는 게 보였다.


무엇보다 이때 만난 3명은 나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려고 했다.

나는 비전공자에 자료도 많이 부족한 상태여서 항상 발제하는 데 여전히 시간이 많이 들곤 했는데, 시험을 앞두고 발제하는 데 너무 시간을 쏟지 말라고 얘기해 주며 자료들을 많이 챙겨주었다.

게다가 과거 시험문제들을 분석하면서 느낀 점들을 토대로 올해 예상문제들을 선별해주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 또한 그들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열심히 공부하게 됐다.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으나 나 또한 예상문제들을 추려서 발제해가곤 했다.

(실제로 내가 발제한 것 중 유사한 문제가 시험에 출제되기도 했다.)


이런 게 스터디의 선순환 아닐까

서로에게 좋은 자극을 주고 더 열심히 할 수 있도록 의지를 북돋아주는 것

1년 차 수험생활의 마지막에 이들을 만난 것은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시험을 앞두고 좋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서 시험 외에는 별다른 걱정거리가 없었다.

그래서 잠시나마 내 수험생활을 되돌아볼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것 같다.

내가 퇴사하지 않았다면 절대 만날 수 없었던 사람들이다.


퇴사한 것을 후회하느냐?

이 3명을 만나기 전 스터디가 망가지고 있었고, 공부에 집중도 제대로 되지 않았을 때는 잠깐 후회했었다.

월급도 없고, 오래 만나던 여자친구와도 헤어지고, 주기적으로 만나던 친구들과의 만남도 피하게 되고, 그렇게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마음이 들곤 했다.


하지만 퇴사하지 않았으면 못했을 값진 경험들이 쌓이고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생기고 나서는 그런 생각들이 자연스레 없어졌다.

언제 그랬냐는 듯 나는 새로운 것들로 내 빈자리를 채워나가고 있었다.


다이나믹하면서도 뜻깊었던 나의 수험 1년 차가 끝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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