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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준업 Oct 15. 2023

첫 번째 시험, 그리고 그 후




어느덧 시험일이 다가왔다.

공부만 하고 있을 때는 시험에 대한 실감이 잘 나지 않았었는데, 고사장이 정해지고 수험표를 출력하고 있는 내 모습을 보니 이제야 좀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수능 이후로 이렇게 오랜 기간 공부하고 시험을 쳐본 적은 처음이다.

대학교 시험은 보통 2~3주, 취업 인적성 시험의 경우에도 길어야 2주

나는 항상 눈앞에 닥친 것들을 쳐내는 시험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한편으로는 1년 동안 이렇게 공부만 했는데도 부족한 상태로 시험 보러 가는 것도 처음이었다.

오랜 기간 공부에만 집중하는 고시생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최소 2~3년 이상을 공부에만 매진하는 시험을 준비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 사람들도 1년 차 때는 나처럼 부족한 상태로 시험을 보러 가지 않았을까

이런 기간을 이겨내고 결국 합격에 도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 대단하다고 느낀다.


내 인생에서 간절하게 합격 하나만을 목표로 오랜 기간 공부하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었다.

항상 '되는대로 살자', '최선은 다하되 만족할 줄도 알자'라는 마인드로 살아왔고, 그래서 어쩌면 나는 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장기간 공부에만 매진하는 삶을 피해왔을 수도 있다.


시험의 합격 여부를 떠나서 이렇게 도전해 볼 수 있는 것도 내 인생이다.

1년 차 수험생으로서 첫 시험장에 들어가기 전 나의 마음가짐은 그랬다.



내가 처음으로 겪어본 한국은행 시험의 난이도는 극악이었다.

그래도 모의고사를 준비하면서 맞든 틀리든 절반정도는 답안을 써 내려가곤 했었다.

그런데 실전 시험에서는 절반은커녕 몇 문제에 밖에 손을 대지 못했고, 그중에서도 몇 개는 문제가 파놓은 함정에 빠져 계산 실수를 했다.


물론 손을 댄 문제들을 다 맞았다고 해도 합격은 역부족이었다.

절반 정도는 끝까지 답을 써 내려가는 것으로 목표를 잡았었는데, 완벽하게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이번 시험에서는 합격이 목표가 아니었기 때문에 크게 좌절하진 않았지만, 2년 차 때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겠다는 생각을 들게 만들어준 시험이었다.


같이 공부했었던 사람들도 이번 시험은 난이도가 상당했다는 평이 대부분이었다.

다들 평소보다 많이 못 풀었다는 얘기가 많았고, 커트라인도 상당히 낮을 것으로 예상했다.

나는 첫 시험이라 전년도와 비교해 난이도를 가늠하기는 어려웠지만, 적어도 나에게만 어려웠던 시험은 아닌 것 같아서 조금은 다행이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스터디원들로부터 연락이 왔다.

시험문제를 복기하자는 것이었다.

그런데 난 시험장에서 문제를 해석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시험 문제가 제대로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쩔 수 없이 스터디원들의 복기본을 받는 것밖에 할 수가 없었다.


시험을 본 사람이 문제를 복기할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시험장에서 문제의 의도와 상황을 잘 파악해 냈다는 것이다.

스터디원 중 올해 합격을 바라보고 있던 친구가 그랬다.

완벽하게는 아니어도 거의 대부분의 문제를 실제 시험과 유사하게 복기해 놨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실력은 이러한 극악의 난이도에서 빛을 발했다.

시험이 끝나자마자 그는 합격에 대한 자신감이 보였다.

절반만 맞아도 합격할 수 있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떠돌고 있을 때, 그는 90% 이상의 문제를 풀었다고 했다.


역시 진정한 고수는 난이도를 탓하지 않는다더니, 예상대로 그는 진정한 고수였다.

내년 시험이 끝났을 때의 내 모습이 저런 모습이면 어떨까

그의 모습은 이제 곧 2년 차 수험생이 될 나에게 강한 자극을 주었다.



시험이 끝나고 나는 잠시 휴식의 시간을 가졌다.

그동안 공부하느라 어질러져 있는 책들과 사물함을 정리했고, 본가에 내려가 오랜만에 부모님과의 시간을 가졌다.


무엇보다 부모님이 제일 걱정하셨을 것이다.

갑자기 다른 분야로 취업하겠다고 회사를 그만두질 않나, 공부 때문에 집을 나가질 않나

그래서 평소에 나는 부모님에게 내년 합격을 목표로 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했다.

실제로도 그렇긴 했지만 부모님은 내가 보는 시험에 대해서 잘 모르시기도 하고, 그저 자식이 합격에 대해서 불안해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 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휴식하는 기간 동안 처음으로 공허한 마음이 들었다.

평소 같았으면 친구들도 만나고 부모님과도 즐거운 시간을 보냈겠지만, 오랜만에 주어진 휴식기를 어떻게 보내야 할지 까먹은 느낌이었다.

1년 간 거의 공부에만 매진하면서 다른 것들을 생각할 틈도 없이 달려왔는데, 잠시 멈춰보니 나는 친구들과 전 직장 동기들과는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과 거리가 멀어지기에 1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했다.


이 휴식기를 잘 활용해야 내년에도 잡생각 없이 공부에만 매진할 수 있을 텐데

오랜만에 찾아온 공허한 마음이 익숙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보통 장기간 공부를 해야 하는 수험생들도 일주일 내내 공부만 하지는 않는다.

하루 정도는 잠시 공부에서 벗어나 온전히 휴식을 취하든, 사람들을 만나든 리프레시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

그들이 공부하기가 싫어서 그런 게 아니라, 그게 장기간 수험생활을 버티는 원동력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그런데 나는 어떻게든 2년 안에 끝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강박 때문에, 일주일 내내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만 하고 있었다.

그렇게 1년을 살아왔는데 어떻게 휴식을 취해야 할지 모르는 것은 당연했다.

연애라도 하면 1주일에 하루 정도는 데이트하면서 자연스럽게 리프레시라도 될 텐데...

그렇다고 한창 수험생이 된 내가 소개팅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한 사람과 장기연애를 해왔던 터라 어떻게 연애를 시작해야 하는지도 까먹었다.


당장의 공허한 마음을 달랠 수 있는 것은 다시 공부하는 것밖에 없었다.

원래는 한 달 정도는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다시 공부를 할 계획이었지만, 공허한 마음이 일주일 정도 지속되니 견디기가 어려웠다.

나는 일주일 만에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2년 차 수험생활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올해처럼 하루도 쉬지 않고 공부만 해서는 오히려 나에게 역효과일 것 같았다.

이제는 또 다른 변화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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