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열심히 할 때에는 밥과 잠, 그리고 건강까지 깎아가며 게임을 했다. 하다하다 눈이 너무 건조해져서 게임과 게임 사이 잠깐 쉬는 틈을 타서 안약을 넣고 눈을 회복하면서 게임을 해댔다. 하루는 당시 매일 12시간 넘게 새벽타임 식당일을 하시는 어머니가 출근 전에 내게 집 밖으로 잠시 나오라고 했다. 없는 시간을 쪼개 만들어주신 밥과 반찬을 나와서 받아가라는 것이었고, 게임에 빠진 나는 내려가지 않았다. 결국 어머니는 오피스텔에 직접 오셔서 음식을 주셨고, 문이 열리고 눈이 마주쳤을 때 그 실망감과 슬픔은 내 인생에서 게임을 떼어내고 나서야 와닿았다.
중독을 인지한 것은 중독에서 벗어난 후다. 롤을 접은 이유는 롤을 너무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때그때 사기인 챔피언들을 공부하고 연습해 티어는 점점 올라갔다. 하지만 실력이 오르면서 인터넷 방송이나 대회에서 최상위권 플레이어들이 하는 플레이의 난이도가 조금씩 눈에 들어왔고, 동시에 그것을 나는 할 수 없다는 것도 알게되었다. 그 사람들을 이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거기다 나만큼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나보다 잘하는 어린 사람들이 점점 늘어갔다. 그 무렵 롤이 내 인생에 도움이 될 일이 없다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롤을 좋아한 이유는 영향력 때문이다. 상대와의 일대일 대결을 하면서도 게임 후반으로 가면 전체 게임 참여 인원인 10명에게 영향력을 과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한 시간도 안되는 짧은 시간 쌓아올린 힘을 바탕으로 팀의 기대를 받고, 상대방의 경계를 받는 느낌은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고 느끼게 해주었다. 게임이 매번 잘 풀리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해서 걱정은 없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몇 분 후면 이번 판은 끝날 것이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렇게 휘발되는 힘에 중독되어 10년 이상을 보냈다.
그래서일까. 힘들 때 게임을 찾게 된다. 큰 마음먹고 롤을 그만하기로 했다가도, 내가 현실세계에서 설 자리가 마땅치 않아 보일 때, 내가 무슨 역할을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지 모르겠을 때 리그로 돌아간다. 그곳에는 항상 내가 설 자리와 해야 할 역할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열심히 할 대상이 당장 눈에 보이고, 그 역할을 실패하더라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오늘은 여자친구에게 공부해야 한다고 말하고 집에 데려다준 뒤에 역 앞에 피씨방에 갔다. 지하철 역과 피씨방이 가깝다고는 해도 눈 앞의 역사로 내려가지 않고 사거리 대각선 반대편에 위치한 피씨방에 가기 위해서는 무려 횡단보도를 두 개나 건너야 한다. 첫번째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건녀편 출구로 내려갈지 피씨방에 갈지 고민했다. 그 고민은 횡단보도를 다 건너고 피씨방으로 가는 횡단보도의 불이 켜질때까지 계속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