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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 이스탄불(Istanbul)

내 마음대로 끼적이는 '이스탄불'

by 자전거


갈라타 타워
갈라타 다리의 낚시꾼들

*천의 얼굴을 가진 '이스탄불'


-이스탄불은 천의 얼굴을 가진 도시이다. 우리에게 흔히 알려진 '동서양 문명의 교차점', '멜랑콜리의 도시', '고양이 왕국',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외에도 수많은 수식어가 존재한다. 그만큼 이스탄불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 깊은 곳에서 신선한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공간으로써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 왔다.


이스탄불은 터키를 대표하는 아주 특별하고 흥미로운 도시이기도 하다. 과연 이 세상에 이스탄불을 빼먹은 터키 기행문이 있을까? 터키를 여행했던 사람 중에 이스탄불만 가 본 사람은 있어도 이스탄불만 안 가 본 사람이 있을까? 이러한 경향이 너무나 확고한 나머지 어쩔 때는 마치 이스탄불이란 도시가 터키 그 자체라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건 착각에 그친다. 아나톨리아 반도는 인류 문명의 발상지이자 크고 작은 문명이 생기고 사라져 간 축복의 땅이다. 그곳에 자리 잡은 터키의 역사가 이스탄불이라는 하나의 도시로 치환되거나 설명될 수는 없다.


그러나 동시에 아나톨리아 반도의 역사에서 이스탄불(또는 콘스탄티노플)이 갖는 위치와 상징성은 그야말로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세계적인 관점에서 봐도 매우 중요한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인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최근에 노벨상 수상자, '오르한 파묵'의 회고록인 '이스탄불, 도시 그리고 추억'을 읽었다. 이스탄불을 대하는 작가의 미묘하고 복잡한 감정들이 책의 구석구석에서 엿보였다. 그것은 작가에 의하면 오랫동안 이스탄불에서 살지 않는 한 결코 느낄 수 없는 감정들이었다.


책을 읽고 난 후 나는 혼란에 빠졌다. 사실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의 실체를 조금이나마 알고 싶어서 책을 집어 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는커녕 정확히 그 반대의 결과를 초래했다. 책은 도시의 실체를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 버렸다. 안 그래도 어려운 수학 공식에 또 하나의 함수가 추가된 느낌이랄까? 이스탄불은 나에게 점점 더 물음표로 다가왔다.


이러한 연유로 글을 쓰기에 앞서 나는 오랫동안 망설이고 고민해야만 했다. 어떤 글을 어떻게 써내려가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이스탄불을 적절히 표현해 낼 수 있을지 그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내린 결론은 '형식'과 '틀'을 벗어난 글쓰기였다. 나 따위가 언제 형식과 틀에 맞춰서 글을 썼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이번 글은 막말로 '돼먹지 않은 나만의 방식'으로 써내려가고 싶다. 시간 순서 상의 기록이 아닌 내 의식의 흐름 상의 기록, 선을 긋는 게 아닌 점을 찍는 기록, 이성보다는 감성에 더 가까운 기록을 남기고 싶다.


오르한 파묵의 책을 몇 권 읽었다고 그의 영향을 받기라도 한 걸까? 이번 글은 다소 모호하고 불명확할지도 모른다. 불평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딱히 상관없다. 사실 내 모든 글의 가장 중요한 독자는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의 나 자신이니까.

*이스탄불은 여자 혼자서는 가면 안 된다고?


-이탈리아 '로마'에서 만난 금발의 여인 '줄리아'. 그녀는 이스탄불이란 지명을 내 머릿속에 확실히 각인시켰다.


이스탄불이 왜 우리의 대화 속에 등장하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분명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와 여행 얘기를 하다가 나왔겠지. 나는 자전거를 타고 반드시 이곳을 지나갈 예정이었으니까.


줄리아는 이스탄불, 더 나아가 터키를 여자 혼자서는 절대로 가면 안 되는 짐승들의 소굴로 묘사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바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넘치는 터키의 상남자들(?) 때문.


"터키 남자들에게 무슨 문제가 있는데?"
"걔네들은 외국인 여성이 터키에 놀러 오는 이유가 자기들과 섹스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해. 특히 혼자 여행하는 금발의 여성을 보면 말이야."
"정말로?"
"응. 그리고 정말로 엄청나게 치근덕거리지. 아주 가만히 내버려두질 않아.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저렇게 들이대는지 모르겠어."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그 당시에는 솔직히 그녀의 의견이 너무 극단적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친절한 터키 친구들에게는 너무나도 미안하지만 그동안 내가 경험해 온 바에 의하면 '줄리아'는 결코 틀린 말을 한 게 아니다. (터키 드라마 '수호자' 1화를 보라. '지나친 일반화'는 피해야겠지만 이 말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걸 알 수 있다.)


그녀는 이스탄불을 '멜랑콜리'의 도시라고도 표현했다. 멜랑콜리(Melancholy)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장기적으로 우울함, 비애, 슬픔, 침울 등의 감정이 드는 상태를 말한다. 오케이. 그 뜻은 알겠다. 근데 멜랑콜리의 도시는 대체 어떤 느낌이란 말인가?


이스탄불에서 삼 주라는 시간을 보낸 지금도 이 물음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다. 하지만 분명한 건 이스탄불에서 나는 그동안 내가 가보았던 그 어떤 곳에서도 느껴보지 못 한 묘한 분위기를 느꼈다는 것이다. 활기차지만 애수(哀愁)가 깃들어 있고, 강렬하지만 모호하고, 아름답지만 무언가 어긋난 느낌.


이스탄불은 세상의 중심이라고 해도 이상할 게 없는 거대하고 화려한 도시였다. 그와 동시에 왠지 모르게 변방의 도시처럼 낙후되고 침체된 도시였다. 이스탄불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원더랜드'처럼 이상하고도 신비로운 곳이었다.

고등어 케밥

*이스탄불은 자전거를 타고 가면 안 된다고?


-이스탄불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순간, 나는 벅찬 감격과 환희를 느꼈다.


그리운 고향까지 달려야 할 거리는 여전히 무려 15,000km도 넘게 남아 있었다. 하지만 유럽 대륙에서 아시아로 넘어왔다는 사실만으로 그리운 고향에 백 배는 더 가까워진 기분이었다. 또한 이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 뿜어대는 힘과 생명력은 어딘지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서울'을 닮았다. 고향의 향기이다.


하지만 벅찬 감격과 환희는 곧 엄청난 스트레스로 바뀌었다. 거대한 메트로폴리탄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대혼란, 예컨대 교통체증과 공해, 소음, 사건/사고 등은 역시나 이스탄불을 피해 가지 않았다. 아니, 그 난잡함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리고 내 감히 단언컨대 이스탄불은 자전거를 타기에 최악의 도시였다.


일단은 언덕! 이탈리아의 로마처럼 일곱 개의 언덕 위에서 탄생한 이스탄불(엄밀히 말하면 옛 비잔티움 지역)은 언덕이 많았다. 이런 언덕을 올라갈 때는 자전거 페달을 돌리기는커녕 내려서 밀고 가기에도 굉장히 힘이 부쳤다. 또한 언덕이 얼마나 길고 가파르던지 이건 무슨 언덕을 올라가는 게 아니라 산을 오르는 거 같았다.


도시의 외곽에서부터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한 파티흐 거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이스탄불에서 자전거 도로 따위 백 년은 이른 이야기였다. (해안가 쪽에 자전거 도로가 있긴 하다.) 도로는 오로지 흉측한 자동차만을 위한 것이었다. 도저히 자전거가 끼어들 틈이 없다. 보행자 도로가 있긴 했지만 때때로 그 폭이 너무 좁아서 지나가는데 애를 먹어야 했다.


도로를 장악한 고급차, 고물차, 화물 트럭, 고속버스, 시내버스, 돌무쉬, 노면전차, 오토바이, 삼륜차 등 엔진이 달린 온갖 것들은 지독한 매연을 뿜어댔다. 매연은 1,5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내뿜는 이산화탄소와 뒤죽박죽 섞여 독이나 다름없는 탁한 공기를 만들었다. 그 공기를 들이마시고 있자니 나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늪에라도 빠진 듯 머리가 어지러워지고 몸의 기운은 쏙 빠져나갔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따로 있었다. 그건 이스탄불의 운전자들. 물론 인도나 이집트의 그것과 비교할 바는 못 되지만 이스탄불의 운전자들 또한 참으로 급하고 포악했다. 그들은 도로 위가 자신의 안방이라도 되는 듯 돌발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운전을 서슴지 않았다. 자전거를 타는 사람 따위 그들의 안중에도 없었다. 나는 고작 한 시간 반 정도 자전거를 탔을 뿐인데 내 옆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로 인해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을 몇 번이나 경험했다. '이대로 차에 치여 죽는 건 아닐까?'라는 공포가 시시각각 나를 사로잡았다.


골목마다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지. 정말 도시 전체가 이리 미어터지고 저리 미어터지는 난민선이나 다름없었다. 흘러내리는 용암처럼 통제할 수 없는 도심의 난잡함에 홀렸는지 나는 난생처음으로 자동차와 접촉 사고를 냈다. 다행히 상대방도 나도 모든 게 찰과상 하나 없이 무사했지만 내 평생 처음 벌어진 일에 나는 꽤 충격을 받았다.

그랜드 바자르

*여행의 '권태기'


- '나는 대체 삼 주 동안 이스탄불에서 뭘 했는가?


언제 다시 돌아갈지 모르는 이스탄불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질문이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질 순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정말 이스탄불에서 많은 걸 놓쳤다. 혹시 이스탄불에 여행 가는 사람이 있다면 꼭 가보라는 소망을 담아서 그중 몇 개만 열거해 보자.


1. '미마르 시난'의 최고 걸작이라 불리는 쉴레마니예 모스크

2. 예레바탄 저수조

3. 골든혼이나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는 페리를 타보는 일

4. 보스포루스 대교를 건너는 일

5. 이스탄불 아시아 지구 탐험

6. 참르자 언덕

7. 카라괴즈(Karagoz) 인형극 관람


사실 이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스탄불에 도착하기 일주일 전부터 오른쪽 무릎이 아프기 시작했다. 오른쪽 무릎은 원래 그리 튼튼한 편이 아니어서 때때로 아프다 안 아프다를 반복해왔다. 한데 이번 통증은 뭔가 그 성질이 달랐다. 미약한 통증이 나아진다는 느낌 없이 계속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여행지를 방문하면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는 들개처럼 하염없이 싸돌아 다닌다. 믿는 건 내 체력! 주변에서는 젓가락 같은 내 다리를 보고 혀를 차지만 사실 내 다리는 무척이나 튼튼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자전거를 타는 요즘은 내 심장도 현역 시절 박지성의 그것에 못지않다고 자부한다. 그래서 걸었다. 도쿄, 시드니, 파리, 뮌헨, 프라하, 바르셀로나, 로마 등 어디에서든 무작정 걸었다. 체력과 충분한 시간이 있다면 도보는 최고의 여행 수단이다.


하지만 이스탄불에서는 무릎 때문에 오랫동안 걸을 수가 없었다. 나는 텅 비어 버린 12인실 게스트 하우스에 혼자 남아서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투숙객들이 모두 빠져나간 한낮의 게스트 하우스는 이스탄불의 그 어떤 곳보다도 조용했다.


언제까지 이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여기까지 어렵게 왔는데 뭐라도 보고 가야 할 것 아닌가? (기억하라! 난 자전거를 타고 왔다!) 그래서 콕콕 쑤시는 통증을 애써 외면하며 이스탄불을 걸었다. 비록 가보지 못 한 곳도 많지만 아야 소피아, 블루모스크, 그랜드 바자르, 톱카프 궁전 등 역사문화적인 장소를 방문했다. 탁심 광장과 니샨타쉬 등도 빼먹지 않았다.


이스탄불은 과연 뭔가가 달랐다.


어떤 곳이 든 간에 더 오래 체류할수록, 더 많이 돌아다닐수록 친숙해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스탄불은 그런 느낌이 없다. 오히려 이 도시를 알아갈수록 왠지 모를 공허함과 진한 여운이 더해갈 뿐이다.


'대체 왜?'


그 당시에는 그 답을 전혀 알지 못했다.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답에 대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었다.


이스탄불에 도착했을 때 집을 떠난 지 어느새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그 때문인지 나는 인정하긴 싫었지만 심한 향수병을 앓았다. 고향에 대한 갈증과 그리움이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크게 다가왔다. 더불어 여독(旅毒)이란 녀석이 나를 더 깊은 구렁텅이로 밀어뜨렸다. 아무것도 하기 싫었다. 다 때려치우고 집에 가고 싶었다. 여행의 '권태기'가 내게 찾아온 것이었다.


내 상태는 좀처럼 나아지지 않았다. 아니, 이스탄불에 머무는 한 나아질 수가 없었다.


2월 말의 이스탄불은 여전히 쌀쌀하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을 타고 그 특유의 멜랑콜리한 느낌이 살갗으로 전해져 왔다. 마치 오르한 파묵이 언급한 '이스탄불의 비애'가 면역력이 약해진 아이를 덮친 독감처럼 나를 덮치는 거 같았다. 이것들은 내 마음에 끊임없는 파동을 일으켰고 무릎의 회복을 늦췄다. 나는 이스탄불을 떠나는 마지막 날까지 '권태'를 완전히 떨쳐낼 수 없었다.

*이스탄불의 아이들


-이스탄불에서는 과거 대제국으로서의 영광과 몰락의 흔적을 동시에 찾아볼 수 있다.


니샨타쉬나 탁심 광장, 그랜드 바자르에 가보자. '과연 세상에 또 이만한 곳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거리 전체에 활력이 넘쳐난다. 길가에 늘어선 수많은 상점들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건을 팔고 있을지도 몰라'라는 착각마저 심어 준다. 잔뜩 흥분한 사람들의 발걸음은 거대한 해류를 타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이쪽저쪽으로 흘러간다.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 톱카프 궁전이 위치한 술탄 아흐메트 광장은 또 어떠한가? 광장에 서서 사방을 둘러보면 어느 것 하나 고풍스럽지 않은 게 없다. 마치 역사책의 한 페이지에 들어와 있는 느낌이다. 이 장구하고 화려한 역사문화유적을 배경으로 경쾌하게 활보하는 다양한 피부색과 언어를 가진 사람들을 보라. 그 모습이 마치 그 옛날 튀르크족 이외에도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럽인, 흑인, 동방의 상인 등이 조화롭게 살아가던 오스만 제국을 연상시킨다.


하지만 놀랍게도 이런 영광스러운 풍경은 그러한 곳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마법처럼 사라진다. 그 자리를 대신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만 같은 오래되고 초라한 건물이 눈앞에 나타난다. 쓰레기와 찌린내가 진동하는 골목 또한 쉽게 발견된다.


눈을 의심케 하는 풍경의 극적인 변화는 내 얼굴을 찡그리게 만들 만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나는 이곳에서 탁심 광장에 느꼈던 것보다 더 큰 활력을, 술탄 아흐메트 광장에서 느꼈던 것보다 더 큰 역사를 느낀다. 어째서냐고? 그건 바로 아이들 때문이다.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넘치는 곳은 비록 낙후되어 보일지언정 결코 어두워 보일 수는 없는 법이다. 이런 점에서 터키의 골목골목은 내가 가 본 그 어느 곳보다도 빛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터키의 길거리에는 유난히 아이들이 많았다. 이스탄불도 마찬가지였다. 광장과 공원, 골목 등 어디에서나 아이들이 가득했다. 그들은 삼삼오오 모여 뛰어다니거나 어떤 놀이를 하거나 소리를 치는 둥 거리 전체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어느 하루는 도심 한가운데에 위치한 공원에 앉아 있었다. 한편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이 한데 모여 피구를 하고 있다. 공원에 있던 대부분의 아이가 참여한 이 게임에서 너도 나도 모두가 무척이나 즐거워 보인다. 나도 체면 따위는 집어치우고 슬쩍 저 속에 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오를 정도이다.


신기한 게 서로 모르는 사이임이 분명해 보이는 데도 다 같이 어울려 논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덩치와 나이도 상관이 없었다. 대다수는 12살 정도로 보이는 꼬마들이었지만 걔 중에는 5~6살의 어린아이도 있었고 중고등학생으로 보이는 큰 친구들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터키의 아이들은 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과도 곧잘 어울려 지내는 거 같았다. 키 작은 어린아이가 자기보다 머리통이 한두 개 정도 더 많아 보이는 사람을 친한 친구처럼 서슴없이 대한다. 단 한 살의 나이 차조차도 진중하게 받아들이는, '안녕하세요'라는 첫인사 이후 '혹시 몇 살이세요?'라고 물어보는 한국 사회와는 정말로 딴판이다.


이스탄불의 아이들은 바빴다. 단순히 공부하고 노는 게 바쁠 뿐만이 아니라 일을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아이들이 음식점에서 배달이라든가 간단한 서빙 등을 하는 광경을 쉽게 목격했다. 그 아이들이란 이제 막 코흘리개를 벗어난 꼬마부터 고등학생까지 연령대가 다양했다. 그런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아이들과 가게의 관계를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저들은 어떤 관계일까? 아버지와 아들? 형과 동생? 아니면 고용주와 고용인?'


언뜻 봐서는 어떤 관계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만약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라면 그건 대체 어찌 된 일일까? 터키 노동법 상에도 일정 나이가 차지 않은 아이를 고용하는 건 분명 불법일 텐데 말이다.


전후 사정이야 어찌 되었든 그들은 언제나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일을 했다. 가게 직원들이 하는 일은 대체로 잘 분업이 되어 있었는데 내 착각인지 몰라도 그곳에 상하관계란 존재하지 않는 거 같았다. 신분과 나이, 맡은 일을 떠나서 서로가 서로에게 친구이자 동료일 뿐이다. 어른과 꼬마마저도 말이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한다는 사실 뿐이다.] 그리스의 철학자 헤라클레이도스가 한 말이다.


아이들이 넘쳐나는 터키에도(엄밀히 말하면 튀르크인들에게) 변화는 찾아오고 있다.


터키도 우리나라처럼 고학력의 여성이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그에 따라 남녀 모두의 평균 초혼 연령이 높아지고 그와 반비례해 출산율은 낮아지고 있다


한편 이스탄불의 정반대, 터키의 동남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보면 상황은 완전 딴판이다. 터키 내 소수민족인 쿠르드족과 시리아인, 아랍인들은 여전히 평균 3명 이상의 아이들을 낳고 있다. 이로 인해 몇십 년 후면 터키의 민족 비율이 뒤바뀌는 건 아니냐는 말도 나온다.

아야 소피아

*이슬람교 바로보기


-학창 시절 국사보다는 세계사를 더 좋아했다. 그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박물관에 가면 작은 물건보다는 큰 물건에 더 관심이 가듯이 말이다. 내게는 우리나라의 아기자기한(?) 사건들보다는 세계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더욱 흥미로웠다.


헌데 생각해보면 초중고를 통틀어서 세계사 교과서에서 '이슬람'의 '이' 자도 보지 못 한 거 같다. '이슬람의 발원'이나 '4대 칼리프 시대', '셀추크 시대'는커녕 '오스만 제국'이나 '이슬람교'를 다룬 내용조차 그 어디에도 없었다. 오스만 제국이나 이슬람교의 역사는 세계사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데도 마치 누군가가 마법이라도 부린 듯 우리나라의 교육 과정에서 감쪽같이 생략되었다.


그 이유를 짐작해 보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우리나라는 사회의 여러 가지 분야에 있어서 서양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역사 교육도 그중 한 가지였고 그 결과 세계사란 곧 '서양의 역사'가 되어 버렸다. '에드워드 사이드'의 저서인 '오리엔탈리즘'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인류의 역사가 오직 서양인의 관점에 의해 해석되어 우리에게까지 전해져 온 것이다.


‘서양의 서양에 의한 서양을 위한 역사’는 19~20세기 제국주의의 잔재이자 편협되고 왜곡된 역사였다. 그들은 '이슬람'과 '중동'의 역사를 세계사에서 철저히 배제했다. 그 여파로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이슬람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바보가 되었다.


물론 나라고 별반 다를 바 없었다. 실제로 '이슬람'을 처음 접한 건 이번 여행을 통해서였으니까. 그전에는 무슬림이나 모스크가 뭔 지도 몰랐다. 히잡을 쓴 여인을 본 적도 없었다. 터키를 여행하지 않았다면 나도 대다수의 한국 사람처럼 이슬람에 대해서 막연한 생각과 편견을 가진 채 살아갔을 게 분명하다.


인터넷 뉴스의 댓글란을 보면 이국 문화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게 얼마나 중요한 지 알 수 있다.


국제 뉴스와 관련해서 그 뉴스가 무슨 내용이든 간에 한국 사람들이 대체로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세 가지 키워드가 있는 거 같다. 그 세 가지 키워드란 아래와 같다.


1.일본

2.중국

3.이슬람.


일본은 모두가 알다시피 일제강점기 때 한민족이 겪은 고통과 수난의 기억, 그리고 과거사를 반성하지 않는 일본 정부의 뻔뻔한 태도가 한국인이 일본을 인식하는 데 있어 지속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거 같다. 일식과 책/만화/애니메이션은 좋아하지만 일본의 정치, 일본 기업, 겉과 속이 다르다는 일본인은 좋아하지 않는 게 대다수 한국인의 태도이지 않을까?


중국은 '민주주의 vs 사회주의'라는 커다란 선 긋기(이데올로기), 그리고 과거와 비교했을 때 완전히 뒤바뀌어버린 한국의 외교노선이 중국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치는 거 같다. (한국은 미국의 외교정책에 있어서 5개의 눈이라 불리는 미국의 최우방국인 영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일본 다음으로 중요한 동맹국이다. 중국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년 한미 연합훈련을 실시하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더불어 불과 이십 년 전만 해도 굶주림에 허덕이고 있던 중국의 급속한 경제발전을 고깝게 보는 한국인의 태도, 경제규모에 결코 부합하지 않는 중국 정부(또는 중국인)의 몰상식한 행태 등도 한몫을 한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나라 역사 교육에서 결코 빠질 수 없는 매우 중요한 나라이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웃나라이기에 그 소식도 주기적으로 듣는다. 그 결과, 역사나 타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일지라도 중국과 일본에 대해서는 자신의 의견을 어느 정도 객관적인 정보에 근거해 피력할 수 있을 정도의 지식수준을 갖추고 있다. (이런 지식이 대부분 부정적인 방향으로 쏠려있다는 게 아쉽지만.)


반면,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그야말로 무지와 무관심, 서양 미디어의 편협된 보도에서 오는 오해로 인한 것이다.


무슬림 인구는 13~16억으로 세계 인구의 1/5에 달한다. 아직도 '무슬림=테러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모두 테러리스트였다면 세상은 이미 악의 소굴로 변모해 있을 테다. 우리가 익히 아는 ISIS, 탈레반, 알카에다, 보코하람 등은 '이슬람'과 아무 상관이 없다. 그들은 무늬만 '이슬람'인 테러 조직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무슬림도 우리와 다를 게 없는 친절하고 순수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유일신 '알라'를 믿고 최후의 예언자라 불리는 '무함메드'를 따르며 '꾸란'의 가르침을 실천하고자 한다. 기독교, 불교, 힌두교 등 어떠한 종교도 사람과 자연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이슬람교'도 마찬가지이다.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의 어머니는 파이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리를 가리키며) 과학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려주지. 하지만 (가슴을 가리키며) 여기 있는 건 가르쳐 주지 않아. 반면, 종교는 우리에게 영혼을 가르쳐주지."


터키는 공식적인 이슬람 국가이다. 국민의 90% 이상이 무슬림이다. 단, '무슬림'이라 자칭하고 이슬람의 5계율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세속적인 사람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터키 사람들에게는 딱 꼬집어 말할 순 없지만 종교를 믿는 사람 특유의 따뜻하고 호의적인 태도가 느껴진다.


그 이유를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아나톨리아 반도'에 상륙한 지 이미 천 년을 훌쩍 넘은 '이슬람교'의 종교적인 관대함이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가슴과 영혼에 깊숙이 자리매김을 했기 때문이 아닐까? 나는 아직까지 터키인만큼 인간미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 보지 못 했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히잡


-내친김에 이 자리를 빌려 '이슬람의 다섯 기둥'과 '히잡'에 대해서 그 정통적인 의미에 준거하여 말해보고자 한다.


'술탄 아흐메트 모스크(블루모스크)'를 방문했을 때, 그곳은 언제나 그렇듯 수많은 방문객들로 넘쳐나고 있었다. 입구를 들어서자 위 사진의 내용을 담은 안내판이 나란히 서있었다. 블루모스크를 구경하느라 바쁜 사람들은 그 누구도 안내판에 주의 깊은 시선을 주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는 이 안내판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이라고도 불리는 '블루모스크'보다 더 흥미로웠다.


아래의 글은 안내판에서 발췌한 것이다.


이슬람의 다섯 기둥


1. SHAHADAH (Declaration of Faith) : 신은 오직 '알라' 뿐이다.

2. SALAAH (Five Compulsory Daily Prayers) : 신성한 장소인 '메카'를 향해 하루 다섯 번 기도하기

3. ZAKAAT (Almsgiving) : 매년 자신의 부의 2.5%를 가난한 이들을 위해 기부하기

4. SAWN (Fasting During the Month of Ramadhaan) : 일 년에 한 달, 라마단 기간에 금식하기

5. HAJJ (Pilgrimage to the Holy Sites in Makkah) : 평생에 한 번은 신성한 장소 '메카' 방문


히잡에 관하여


히잡은 세간에 논쟁이 되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논쟁은 히잡을 잘못된 시선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히잡은 보통 여성이 자신의 신체 부위(특히 머리)를 가리는 시각적인 행위로 받아들여지지만 사실 그 안에는 더 심오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히잡의 사전적 의미는 '가리고 은폐하다'라는 뜻으로 그 행위의 수단은 언어가 될 수도 행동이 될 수도 복장 등이 될 수도 있다. 넓은 뜻의 히잡은 단순히 옷으로 신체부위를 가리는 걸 넘어서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매사 신중하고 조심히 처신하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히잡은 남성들의 불건전한 의도와 시선으로부터 여성을 보호한다. 또한 외모나 유행 따위의 겉모습보다는 내면의 아름다움, 올바른 지성, 도덕 등의 가치를 일깨워준다. 히잡을 착용함으로써 여성은 더 큰 자유를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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