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민들의 이야기
6.
민혁은 전공 수업에 매주 늦었다. 다행히 교수님은 출석에 그렇게까지 깐깐하신 분이 아니었지만, 민혁을 ‘지각쟁이 학생'이라고 부르기까지 이르렀다. 어쩔 수 없었다. 민혁의 과 건물은 제주대학교 중에서도 가장 안 쪽, 가장 높은 지대에 있었다. 정문에서 학교 셔틀을 놓치면 방법이 없었다. 걸어가려고 하면 종아리가 터질 것 같았다.
민혁과 동기들은 맨날 과 건물을 욕하며 ‘전공을 잘못 선택했다'라고 한탄했다. 그들이 가장 질투하는 대상은 정문 바로 옆에 건물이 있는 자연과학대 학생들이었다.
불평을 할 때는 절대 인정하지 않았지만 사실 민혁은 과 건물에 마음에 드는 면이 하나 있었다. 지대가 높아 날씨가 좋은 날에는 바다까지 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것이었다. 자연과학대에서는 정문 앞의 식당밖에 보이지 않았다.
산에서 바다를 바라보는 것은 바다를 가까이서 볼 때와는 달랐다. 연한 파란빛의 하늘과 진한 푸른빛의 바다 사이의 경계가 명확한 지평선이 아닌, 마치 포토샵으로 블러를 해 놓은 듯한 애매한 그라데이션으로 합쳐졌다. 그 점이 마음에 들어서인지 동기들이 하나둘씩 전과를 할 때도 민혁은 끝까지 과에 남았다. 자신을 ‘지각쟁이 학생'이라고 부르는 교수님 밑에 석사로 들어가 7년 동안 제주대학교 가장 높은 건물에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7.
민지는 공부를 하다 말고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 반이었다. 3학년 1학기 기말고사까지 열흘 정도 남아있었다. 민지는 피곤한 눈을 꾹꾹 누르며 이번 시험까지만 보면 고비는 지나간다고 스스로를 격려했다. 기말고사가 끝나면 민지는 학교장 추천 전형으로 수시 원서를 접수할 계획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내신 성적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민지는 항상 전교 1, 2등을 놓치지 않기 위해 악으로 깡으로 공부해왔다.
사실 민지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학벌이나 사회적 성공에 대한 욕심이 큰 편은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이 섬에서 벗어나고 싶다, 바다를 건너 더 넓은 세상으로 가고 싶다는 생각이 강했다. 하지만 아버지는 민지가 어렸을 때부터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가 아니면 제주대학교 사범대를 가라고 했다. 민지의 오빠는 서강대학교를 갔지만, 아버지는 여자에게는 교사만큼의 직업이 없다며 서연고 갈 실력도 안된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민지는 아버지가 기분전환을 하라며 해안도로를 드라이브 시켜줄 때마다 바다를 보며 중고등학교의 여자 선생님들을 생각했다. 여자 선생님들 중에서 유난히 똑똑하다고 느껴지는 선생님들이 많았다. 민지의 친구들은 그 시대에 남자들은 똑똑하면 섬에서 벗어났지만, 여자들은 선생님이 되어서 그렇다며 말했었다. 바다를 보면 민지가 만난 뛰어난 여자 선생님의 얼굴이 하나씩 떠올랐다. 햇빛이 일렁이는 바다에 반사되어 반짝일 때마다, 민지는 아름다움보다는 중압감을 느꼈다.
8.
상민은 제주 탑동 이마트에서 근무했다. 탑동 이마트는 간척지 위에 세워진 건물이다. 이마트 앞에는 넓은 야외 주차장이, 야외 주차장 앞에는 1차선 도로가 있고, 1차선 도로 앞에는 작은 벽이, 벽 너머에는 방파제가 있다. 그리고는 바로 바다였다.
상민이 마감 쉬프트에 일을 할 때면 10시가 넘어서 집에 가는 경우가 많았는데, 가끔 바람이 거센 날이면 벽 너머로 파도가 넘어왔다. 이 땅이 원래는 자기 것이라고 선포하듯 바다는 매섭게 요동쳤다. 주차장 옆의 1차선을 타고 가다 보면 자동차 위로 후드득 하고 파도의 잔해가 떨어졌다.
상민은 그렇게 큰 파도가 무서웠다. 어둠 속에서 자신을 집어삼킬 듯이 오는 그 기세가 두려웠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해 차 안에서 크고 길게 기합을 넣었다. 태풍이 오는 여름에는 차 안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운전하는 상민의 모습이 자주 포착됐다.
9.
영민은 제주도에 내려온 한 달 동안 하루도 빼먹지 않고 해변으로 나가 바다를 바라보았다. 캠핑 의자를 하나 사서 방파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비가 오면 우산을 들고나가서 10분이라도 보고 오고, 날씨가 좋으면 3시간도 바다를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영민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은 일몰이었다. 두 달 전 영민은 일몰을 볼 일이 회사에서밖에 없었다. 정신없이 일하다가 너무 힘들 때 노을 지는 시간에 맞춰 탕비실을 갔다. 회사에는 좋은 게 별로 없었지만 강남 고층 빌딩이라 뷰만큼은 좋았다. 하늘이 주황빛이 되면 건물들 역시 아름다운 색으로 물들었다. 밑에 보이는 대로에는 퇴근하는 차들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영민은 항상 커피를 손에 들고 그 장면을 5분가량 바라보며 마음을 다잡았다.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영민은 정시퇴근을 일주일에 한 번도 못할 때가 많았다. 온라인 마케팅은 성과가 실시간으로 집계되고, 관리도 실시간으로 할 수 있어 퇴근 후나 주말에도 모니터링을 해야 했다. 1분 1초마다 변하는 성과를 보며 영민은 모든 것이 멈춘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영민이 담당하는 광고주 성과가 저조하자, 팀장은 영민에게 9시 출근을 권했다. 사실 영민의 회사는 자율출근제를 도입해 9시부터 6시 혹은 10시부터 7시 근무를 선택할 수 있는 정책이 있었지만, 어차피 아무도 정시퇴근을 하지 못해서 대다수가 10시 출근을 택했다. 결국 영민은 한 달 동안 아침 9시부터 저녁 10시까지 일했다.
여느 때처럼 노을 시간에 탕비실에서 창밖을 바라보던 영민은 문득 자신이 더 이상 노을을 보며 아름답다는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저 찬란한 주황색으로 빛나는 태양과 자동차와 대로와 건물이 모두 폭발해서 모두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영민은 더 이상 버틸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사직서를 내고 무작정 제주로 내려왔다.
해가 바다에 잠겨 반원이 될 때, 구름이 하늘 위에 파란색과 보라색, 분홍색을 수놓으며 1분 1초마다 하늘과 바다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영민은 그 장면을 하나하나 놓치지 않으려 집중하며 해가 완전히 바다 뒤편으로 사라질 때까지 지켜보았다. 노을의 변화를 볼 때만큼은 변화가 자신을 옥죄였던 회사 생활이 멀게 느껴졌다. 그러다가 어둡게 일렁이는 바다를 보면 알 수 없는 절망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 어떻게 일해야 할지 바다를 바라보며 영민은 오랫동안 잔잔히 생각해보았다.
10.
“진짜 대단하네, 현수 씨.” 점심시간 후 카페에 갈 때마다 텀블러를 꼭 챙겨 다니는 현수를 보며 동료들은 한 마디씩 칭찬을 건넸다. 현수는 그런 말이 불편했다. 소심하고 조용한 성격의 현수는 주목받는 것이 싫었다. 유난인 것처럼 보일까 봐 걱정했지만, 그러면서도 매번 텀블러를 챙겼다.
한 번은 과장님이 현수의 텀블러를 보고 농담을 했다. “현수 씨가 열심히 텀블러 갖고 다니면 뭐 하나, 내가 오늘도 종이컵 세 개나 썼는데, 허허.” 과장은 그리고는 앞으로 종이컵을 하나만 쓰겠다고 덧붙였다. 현수는 살짝 웃어주었다. 사실 현수가 텀블러를 열심히 쓰는 것을 무력화하는 것은 과장이 하나 더 쓴 종이컵이 아니라, 그것보다 큰 것들이었다. 예를 들면 현수네 회사가 생산하는 어업용 그물이나 장비 같은 것들 말이다.
현수는 2주에 한 번씩 바닷가에 가서 쓰레기를 주웠다. 관광객들이 많은 해변에는 플라스틱 컵, 슬리퍼 같은 쓰레기가 많았고, 낚시꾼들이 좋아하는 장소에는 낚싯줄이나 플라스틱 찌가 많았다. 현수는 쓰레기를 주우며 바다에게 사죄했다. 현수가 혼자 쓰레기를 주워봤자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었다. 텀블러를 열심히 써도 크게 달라지는 것이 없는 것처럼. 그래도 회사를 그만둘 수도, 플라스틱 컵을 없애버릴 수도 없었기에 현수는 주말에 쓰레기를 줍고, 점심시간에 텀블러를 쓰고, 선거 때는 열심히 투표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