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를 송 기사님이라 불렀다.
후덕한 인상의 사람 좋은 아저씨.
당신의 첫인상은 그랬다.
어머니 회사의 동료 직원이었던 그분은 회사에서의 직책이 기사였다.
나와 그분의 첫 만남은 어머니의 직장 동료로서 우리 집 첫 방문이 시초였다. 자연스럽게 아버지와 친구가 되었고 가끔씩 전화도 하고 선물 보따리를 챙겨 집에도 찾아오는 사이가 되었다.
어머니는 직장동료라는 이유로, 그리고 너무 베풀기만 하시는 그분의 성격이 어려워 억지로 거리를 두고자 하시는 모습이 어린 사춘기의 내게는 몹시 부자연스럽게 비쳤다.
잊힐만하면 전화해서 안부를 묻고 가끔씩 때로는 과일을 때로는 고기를 한 묶음씩 사들고 우리 집을 찾는 그분의 성의가 여간 고맙지 않았다. 부담스러워하는 하시는 어머니와 낯가림이 심해 데면데면하게 대하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대학생활 중 병을 얻어 휴학을 하고 집에 와 있는 동안 그분은 사흘 드리 우리 집에 오셨다.
나의 건강 회복을 위해 자기 일인 양 안타까워하시며 당신이 아는 건강 지식으로 나의 몸을 마사지하고 기를 불어넣으셨다.
그 영향인지는 지금도 알 수 없지만 나는 기적처럼 건강을 회복해 학교에 복학했다.
그리고 나는 그분을 잊고 살았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도 한 번도 그분을 찾지 않았다.
가끔씩 본가에 가면 부모님을 통해 그분의 안부를 묻는 게 고작이었다. 한 번씩 부모님께 전화가 오고 놀러 오신다는 소식만 전해 듣고 있었다.
어쩌다가 가끔 전화로 인사를 드리고 안부를 여쭙는 게 내가 한 유일한 일이었다.
그분의 막내아들은 내 중학교 후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불교학생회로 인도한 것도 나다.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를 불교에 입문시키고 나는 그의 불교 학생회 선후배지간이 되었다.
그는 지금 부산에서 내과 의사가 되었다.
지난 11월에 부모님이 청도로 이사를 하셨다.
부모님도 나도 그분께 부모님의 이사 소식을 전하지 못했다.
까맣게 잊고 지냈다.
어제 본가에 가서 송 기사님께 전화가 왔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오늘 오래전 그분이 생각났다.
부모님처럼 인자하고 나를 생각해 주시던 그분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망설임 없이 그분의 아들인 중학교 후배에게 연락해서 전화번호를 물었다.
전화 말미에 후배에게 아버지 모시고 청도로 한번 놀러 오라고 말했다. 후배의 대답은 내 심장을 무너뜨렸다.
"아버지는 올해 아흔셋이라 장거리 여행이 힘드십니다."
오늘 저녁에 그분께 전화를 드렸다.
수화기 너머로 송 기사님의 힘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단지 '여보세요'라고 한마디 했을 뿐인데 그분은 단번에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누군지 알아채셨다.
몸이 너무 아파서 아무 데도 갈 수 없다는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는데 목이 메었다. 수화기를 들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다음에 찾아뵐 때까지 잘 계시라는 말씀만 겨우 드렸다. 내 눈에는 뜨거운 회한의 눈물이 흘렀다.
부디 더 늦지 않게 그분을 다시 찾아뵙기를 바라본다.
"아저씨 너무 미안합니다. 그리고 너무 감사했습니다."
내 평생의 은인인 그분께 나는 너무 무심했다는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