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학년 팔 반이 된 지금 나는 늙음에 집중하고 있다.
늙어간다는 걸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다. 그렇지만 한 번도 젊게 보여야지, 어려 보여야지 하고 생각한 적은 적어도 한 번도 없었다.
비근한 예로 나는 태어나서 여태 한 번도 머리 염색을 해 본 적이 없다.
사춘기 시절에는 누구나 그렇듯이 빨리 자라 어른이 돼야지 했었다. 어른이 되면 술도 마시고, 당구장에도 가고, 담배도 폼 나게 피고, 18금 영화도 맘대로 보리라 다짐했었다.
실제로 그날은 곧 도래했고 하고 싶었던 일들을 마음껏 해 봤다.
대학시절 민주화를 위해 가열한 투쟁을 하는 친구들의 모습을 보며 용기가 생기지 않아 마음속으로 소리 없는 응원만 보냈다.
아침이슬을 부르며 분노했고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르며 눈물 흘린 적도 있었지만 그건 내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그 또한 분위기에 휩싸인 소리 없는 외침이었다.
내게 온 생애를 통틀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시기를 고를 기회가 다시 온다면 나는 대학시절을 선택할 것이다.
그만큼 아쉬움이 컸던 대학 생활이었다.
가장 화려해야 했을 대학 생활이 내겐 가장 우울한 시절이었다.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리면서 나는 삶의 의미에 대해 조금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일상은 나를 내가 원하는 대로 살도록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그냥 가족을 부양하고 가정적인 아빠가 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며 살뿐이었다.
몇 번의 이직과 경력에 따른 진급이 나이가 드는 것에 대한 소소한 보상일 따름이었다. 그리고 반복되는 일상과 직장생활의 권태로움은 한잔 술에 의지할 뿐이었다.
꿈도 희망도 내 의지에서 멀어진 지 오래였다.
더 나은 집과 자동차, 그리고 아이들의 우등상이 그때의 나를 위로할 수 있는 유일한 출구였다.
그리고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취미를 만들었다.
낚시도 하고 사진도 찍고, 그리고 산에도 올랐다.
문득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궁금했다.
SNS나 소셜미디어로 그들의 삶을 엿보았다.
아니, 그들의 삶 중에서 부족하고 어그러진 것들만 보려고 애썼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보다 더 윤택하고 더 고급진 삶을 사는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시기하고 질투하던 것이 그 시절 나의 참모습이었다.
그리고 마흔이 되던 해 나는 크게 앓았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기사회생하여 다시 일상으로 돌이 왔다.
그리고 나는 알게 되었다. 나의 그러한 헛된 삶이 한낱 부질없는 시간 낭비였음을.
그때부터는 내 삶이 순탄했다.
마음을 비우고 나니 세상이 밝게 보였다.
내가 바닥이 아니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바닥을 겪어 본 사람이 느끼는 삶이란 얼마나 진실되고 진지한 것인지 겪어 본 사람만이 알 것이다.
이제 나는 살아갈 날들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게 남았음을 안다. 내 아내와 두 딸들의 존재가 소중하고 감사하다.
주말이면 찾아 뵐 수 있는 부모님의 존재가 감사하다.
그리고 나를 알고 나를 생각해 주는 소중한 이들이 있음을 감사하며 살고 있다.
설령 내 삶이 다시 나락으로 떨어진다 해도 자책하지 않으며 살거라 다짐해 본다.
나는 늙음을 거부하지 않는다. 거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나는 나의 늙음을 오롯이 받아들이며 살 자신이 생겼다.
지금의 나를 사랑하며 살기로 했다.
그것은 내 행복의 시작이요, 내 늙음에 대한 예의이기도 하다.
문득 한때 내 애창곡 이기도 했던 고인이 된 가수 신해철의 노래가 오늘 밤엔 듣고 싶어졌다.
나에게 쓰는 편지
신해철
난 잃어버린 나를 만나고 싶어
모두 잠든 후에
나에게 편지를 쓰네
내 마음 깊이 초라한 모습으로
힘 없이 서 있는 나를
안아주고 싶어
난 약해질 때마다
나에게 말을 하지
넌 아직도 너의 길을
두려워하고 있니
나의 대답은 이젠 아냐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 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 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
오오오오 워 워워워워
이제 나의 친구들은 더 이상
우리가 사랑했던 동화 속의
주인공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고호의 불꽃같은 삶도
니체의 상처 입은 분노도
스스로의 현실엔 더 이상
도움 될 것이 없다 말한다
전망 좋은 직장과
가족 안에서의 안정과
은행계좌의 잔고 액수가
모든 가치의 척도인가
돈 큰 집 빠른 차 여자 명성
사회적 지위
그런 것들에 과연
우리의 행복이 있을까
나만 혼자 뒤떨어져
다른 곳으로 가는 걸까
가끔씩은 불안한 맘 도
없진 않지만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날 바라보는 친구여
우린 결국
같은 곳으로 가고 있는데
때로는 내 마음을
남에겐 감춰왔지
난 슬플 땐 그냥
맘껏 소리 내 울고 싶어
나는 조금도 강하지 않아
언제부턴가 세상은 점점
빨리 변해만 가네
나의 마음도 조급 해지지만
우리가 찾는 소중함 들은
항상 변하지 않아
가까운 곳에서 우릴 기다릴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