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은 다시 농부를 찾아왔습니다
주말농부일기(2023년 2월 17일 - 18일)
by
석담
Feb 18.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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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오후가 되면 시간은 더디게 간다.
월요일부터 '빡시게' 달려온 하루하루가 금요일 오후부터는 느리게 흐른다.
도시농부의 4도 3촌을 시작하는 첫째 날을 기다리는 농심은 퇴근길 자동차의 정체 속에서도 설레기만 한다.
길었던 지난겨울의 추위와 동면도 오늘은 용서되는 날이다. 농막 앞에 차를 주차하고
내려서
내딛는 걸음에서 스펀지 위를 걷는 듯한 푹신함이 느껴진다.
이것이 진정 봄의 느낌이다.
겨우내 얼어붙은 토양의 바싹 마른 황톳빛 흙에서 느꼈던 거칠고 딱딱한 감촉은 어느새 사라지고 봄비에 해동된 흙이 5센티쯤 붕긋 솟아 오른 듯한 기분이 든다.
지난번 덕유산 눈꽃 산행 때 밟았던 발목까지 쌓였던 눈의 감촉처럼 부드럽다.
어둠이 내린 청도의 아담한 마을 한 언저리에서 바라본 야경은 시 한 편이 금방 써질 것 같은 노스탤지어를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불러 낸다.
어느새 우리 농막 터줏대감 길냥이가 주인을 알아보고 데크 위로 달려와 먹이를 달라고 시위한다.
철밥통에 수북이 담아주니 주인장은 안중에도 없고 사료 흡입신공을 보여준다.
길냥이 부부에게도 불문율 같은 원칙(?)이 있다. 수컷 길냥이는 절대 암컷 길냥이 보다 먼저 식사를 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런 동물에게서도 '레이디 퍼스트'는 배움직하다.
농막에 자리를 잡고 우선 너튜브로 음악을 한곡 들었다.
얼마 전에 류승룡, 염정아 배우 주연의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영화에 OST로 나왔던 가수 토이의 '뜨거운 안녕에 꽂혀 며칠째 듣고 있다.
딱히 뜨겁게 안녕할 사람은 없지만.
https://youtu.be/vohSjuCI_io
농부에게도 불금이다.
박주산채면 어떠한가?
이런 밤에는 소주에 컵라면이어도 좋다.
디카페인이 아니면 어떠하리?
한잔의 커피가 있으니 밤을 보내기에 충분하다.
늦은 취침으로 날이 센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잤다.
잔뜩 찌푸린 하늘에 연무가 자욱하게 건너편 복숭아밭까지 밀려왔다.
이제 본격적인 주말농부의 하루가 시작되었다.
어제 밤늦도록 반복학습한 너투브 강의를 복기하며 세 그루의 자두나무와 호두나무, 한 그루의 미니사과, 두 그루의 대추나무, 그리고 일곱 그루 감나무의
가지치기를 시작했다.
자두나무는 사람 키보다 조금 커서 그냥 서서 전지가위로 가지치기를 해도 되지만 대추나무와 미니사과는 사다리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회사에서 안전관리자의 역할도 맡고 있는 나로서는 A자 사다리를 쓰면서 이런 이율배반이 있나 하는 생각을 했다.
사다리 본연의 역할은 높은 곳에 올라가는 용도이지 작업을 위한 용도가 아니라는 건 안전교육의 기본인데
나는 지금
기본도 안된 농부가 되어 있는 것이다.
호두나무와 감나무는 너무 높아서 감히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아래쪽 가지만 대충 정리하려고 엉거주춤한 자세로 나무 아래를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그때 낯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뭐 하시누?"
우리 밭 옆에 사시는 할머니였다.
"이모님 안녕하세요? 오늘 집에 계시는군요.
감나무 가지치기 좀 하려고 합니다."
할머니라 부르면 기분 나빠하실 것 같아서 이모님이라 부르고 있었다.
"감나무는 높은 데 가지를 쳐야 하는 거라."
하시고는 집으로 쌩 들어가셨다.
백번 지당하신 말씀이다. 지난가을 나는 감을 따면서 높은데 달린 감들은 수확할 방법이 없어서 까치밥이라는 이름으로 까치들에게 헌납했다.
오전 내내 가지치기하느라 톱질을 했더니 오른쪽 어깨가 뻐근했다. 그래도 오늘의 할당량을 채우려면 여기서 멈출 수 없었다. 오후 시간에는 작년에 밭에 깔아 두었던 멀칭비닐을 걷어야
했다
.
밭이랑에는 비닐을 덮고 고랑에는 잡초 방지를 위해 제초매트를 깔아 둔 터라 한 해 농사가 끝나면 걷어 낸 후 올해 농사를 위해 새로 덮어야 하는 것이다.
밭고랑이 열개가 넘으니 단순히 계산해도 걷어야 될 비닐이랑 제초매트 숫자는 20개가 넘는다.
하나 걷고 커피 한잔 마시고, 또 하나 걷고 화장실 한번 다녀오고, 그러기를 수도 없이 한 듯한데 아직 반도 못 걷었다.
허리며, 다리며 안 아픈 데가 없이 금방 몸살이 올 것 같았다.
나는 특단의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그래, 오늘은 여기까지다.'
시간은 오후 다섯 시를 넘겨 저녁으로 가고 있었다.
지치고 힘든 주말 농부의 일상은 전업 농부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제대로 된 농사에 배가 고프다.
그것은 주말마다 내가 농부로 사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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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농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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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Brunch Book
도시 농부의 4도 3촌기
02
배추가 익을 무렵
03
농막의 겨울풍경
04
봄은 다시 농부를 찾아왔습니다
05
꽃 피는 봄이 오면
06
개구리는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도시 농부의 4도 3촌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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