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막의 겨울풍경
주말농부일기(2023년 1월 7일 - 8일)
새해가 밝은 지 여러 날이 지나도록 바쁘다는 핑계로 내팽개쳐 두었던 낙만정(樂滿亭) 농막을 찾았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는 주말농장이라는 거창한 명분으로 주말마다 뻔질나게 찾던 농막이었지만 가을걷이가 끝나고 농한기가 되면서 농막에 오는 횟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그래도 완전히 발길을 끊은 건 아니었다. 지난 연말 고교 동창들과 송년회 모임을 가장한 질펀한 음주는 물론 화로대에 불을 피워 불멍까지 하는 호사도 누렸다.
그것도 잠시 낙만정은 깊은 겨울잠에 들었다.
어제 오후에 찾은 농막은 깊은 정적에 묻혀 있었다.
살아 움직이는 생물체의 흔적이라고는 찾을 수 없었다.
시들어 버린 풀들과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나무들, 그리고 진한 갈색의 풍경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간혹 농막 데크에서 사료를 주워 먹던 길냥이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농막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수도가 얼지 않았나 하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화장실은 라디에이터를 켜놓고 가서 문제가 없었지만 수도가 얼어 있으면 당장 화장실을 이용할 수도 없고 커피 한잔 내려 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수도 계량기의 밸브를 열고 싱크대로 달려갔다.
항상 나쁜 예감은 틀리지가 않는다고 했던가?
수돗물이 나오지 않았다. 진땀이 돋기 시작했다. 다시 수도 계량기 밸브를 닫았다 열었다 해 보았지만 수도에서는 도통 물소식이 없다.
나는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마당에 있는 수돗가로 달렸다.
수도꼭지를 트니 물소리가 났다.
나는 속으로 아싸 하고 외치며 다시 싱크대로 달렸다.
싱크대의 수도꼭지를 여니 잠깐의 정적이 흐른 후에 펑하는 뚫리는 듯한 소리와 함께 수돗물이 콸콸 쏟아져 나왔다.
나는 한 잔의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생각과 화장실에 갈 수 있다는 안도감에 쾌재를 불렀다.
좌탁에 앉아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뚝딱 한 편의 브런치에 올릴 글을 완성했다. 농막 앞 데크에 나가보니 달이 휘영청 밝았다. 모아둔 잡목과 나무 등걸을 이용해 화로대에 불을 지폈다. 달빛 아래 불멍은 퍽이나 운치가 있었다.
불이 꺼질 무렵 알루미늄 포일에 고구마 두 개를 싸서 숯더미에 파 묻었다. 잠시 후 군고구마와 커피로 저녁 식사를 대신했다.
책을 봐야겠다고 펼쳐 놓았지만 내손은 벌써 스마트폰의 OTT 영화 프로그램을 검색하고 있었다.
그렇게 다운로드하여 온 두 편의 영화를 감상하고 이미 달구어진 전기패널 위의 뜨끈한 이불속으로 향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창문으로 비집고 들어온 아침 햇살에 눈을 뜨니 해는 벌써 중천에 올라 있었다.
현재 기온 영하 9도.
이불 밖은 위험하다는 말이 떠올라 피식 웃음이 났다.
외투까지 챙겨 입고 농막 앞 데크로 나섰다.
영하의 날씨에도 햇살은 무척 따가웠다.
잠시 캠핑 의자에 앉아 햇살을 쬐며 아침을 느껴 보기로 했다.
어제까지 황량하게만 보이던 주말 농장에 생기가 돌았다.
이름 모를 새들이 여기저기서 지저귀며 바쁘게 왔다 갔다 했다. 겨울이라 그런지 살이 통통하게 오른 새들도 있고 생전 처음 보는 화려한 깃털을 가진 새들도 있다.
동네를 떠도는 누군가의 집에서 살았을 낯선 개 한 마리도 밭 주변을 어슬렁 거리고 있었다.
밭 여기저기를 유랑하며 하나씩 천천히 둘러보았다.
지난봄부터 가을까지 농막 앞을 화려하게 장식했던 꽃들은 흔적도 없고 퇴색한 빛깔의 나뭇가지만 앙상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도 지난 계절의 화려했던 기억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가을에 심은 양파와 마늘은 매운 성질만큼이나 비닐멀칭 아래에서 이 추위에도 꿋꿋하게 잘 자라고 있는 듯 보였다.
10월에 파종한 봄동은 추위와 싸우느라 아직 많이 자라지는 못했지만 파릇한 초록을 지켜내며 부직포 아래서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돌아오는 봄에 아삭한 봄동 무침을 해먹을 생각에 벌써 입에 침이 고였다.
데크 위의 길냥이들 밥그릇에 사료를 채워두고 오디오의 음악을 틀었다.
리처드 막스의 "Right here waiting"이 흘러나왔다.
농막이 내게 이야기한다. "나는 항상 여기서 당신을 기다릴게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