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추가 익을 무렵

주말농부일기(2022년 11월 12일 -13일)

by 석담

10월 말에 파종한 배추가 이제는 거의 내 머리보다 커져 시장에 파는 김장배추만큼 자랐다.

오십여 포기 가까이 심었더니 올해는 김장배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무도 심고 쌈배추도 넉넉하게 심어 이웃과 나눠 먹는 호사까지 누렸으니 농부의 보람은 이런 건가 보다.


올해는 제대로 된 배추를 키워 보려고 퇴비와 유박비료를 듬뿍 뿌려 밭을 만들고 배추 모종을 심고 벌레가 범접하지 못하도록 약을 치며 공을 들였다.

칼슘제를 살충제랑 섞어 엽면시비하고 복합비료를 듬뿍 주었더니 그런대로 쓸만한 배추로 자라 주었다.


지난 주말 본가에 들렀더니 어머니가 배추전을 부쳐서 먹어 보라며 주셨다.

하얀 빛깔의 배춧살이 먹음직스러워 하나 집어 입에 넣고 씹어 보니 정말 싱싱한 맛이 느껴졌다.

문득 예전 시골의 큰 집에서 먹던 배추전이 생각났다.


어릴 적 시골의 추석 차례에는 배추전이 꼭 제사상에 올랐던 기억이 난다.

가마솥을 뒤집어 화덕에 걸고 돼지기름을 바르고 물 같은 밀가루 반죽과 배추를 조합해 만들어 내던 큰어머니의 배추전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배추전은 뜨끈할 때 쭉쭉 찢어 간장에 찍어먹는 맛도 좋지만 겨울밤 차게 식어버린 배추전을 썰어 한입 먹으면 사각사각 씹히던 하얀 배추 줄기의 서걱거림은 지금 생각해도 최고의 식감이다.


배추 옆 한편에는 김장무가 잘 자랐다.

서리가 내리고 기온이 영하로 떨어지면 무가 언다 해서 지난주에 대부분 수확해서 두고두고 먹을 요량으로 땅을 파고 묻었다.


어제 어머니는 남은 무를 뽑아 오라 하셨다.

동짓 때 먹을 동치미를 담으실 거란다. 동짓날 긴긴밤에 뜨끈한 팥죽과 살얼음 낀 동치미 국물 한 그릇이면 겨울밤도 더없이 행복해질 것이다.

그리고 남은 무를 썰어 말려서 무말랭이 김치 -내 고향에서는 '골금짠지'라 불렀다-를 만드실 거라 하신다.


어머니의 굽은 등허리와 굵어진 손마디를 보면 작년에 돌아가신 큰어머니 생각이 난다.

어머니가 부쳐주신 배추전과 골금짠지가 큰어머니가 해주시던 그 맛과는 다르지만 나는 어머니에게서 큰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소염진통제를 비타민처럼 챙겨 드시는 팔순의 노모.

밭에 가시지 말라는 내 애원에도 당신은 항상 불편한 몸으로 밭에 가서 일을 하고 내게는 가지 않았다 말하셨다.

그렇지만 나는 안다.

농막에 가지런히 놓인 내 슬리퍼,

세숫대야에 감춰져 있는 홍시를 보며 나는 또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내고 눈물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