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과 두려움
서빙 일을 마무리 지었다. 풀타임 오피스를 시작함으로써 Availability가 심히 줄어들고, 그에 따라 스케쥴 문제가 잦아졌으며, 식당 헤드오피스의 정책 변경으로 더 이상 취미로써 남겨둘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참 배은망덕한 놈이라는 생각을 한다. 캐나다 이력도 없고 말도 똑바로 못하는 놈 주워와서 키워줬더니 대가리만 커져서 "이 날 안돼요", "이 시간에 일하게 해주면 안되나요?" 하다가 결국 그만둔 꼴이다.
일을 못구해서 긴장된 나날을 보냈던 날들을 기억한다. 거둬주심에 감사하며 어느 날, 어느 시간이든 모두 일할 수 있다며 자신했었다. 왜 나한테만 뭐라하냐고 화났을 때도 있었다. 이 일 때문에 한 달 넘게 하루도 쉬지 않고 일을 한 때도 있었다. 마지막 쉬프트를 마치고 가게를 보는데, 감성이 터져 그 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솔직히 말하면 조금 두렵기도 하다.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려면 아무래도 새로운 일을 구하는게 좋을 듯 하다. 비자가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이미 적응한 일터를 떠나 새로운 일을 시작하는 건 여간 쉬운 일이 아니다. 일부러 스스로에게 위기를 줌으로써 성장하려 결정했지만 이별이 달가울 순 없지. 그냥... 새롭게 시작할 나를 응원할 수 밖에.
새로운 일을 찾아서 그만둔게 아니기 때문에 마무리라는 느낌이 심하게 든다. 캐나다를 떠날 때 이런 기분이 들까.
그렇게 포잡에서 쓰리잡이 되었다.
이주공사
임플란트 모델링 (CAD)
Research Assistant (MARI, Volunteer)
1. 이주공사
내 메인 잡인 이주공사. 꽤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다. 꼼꼼하지 못한 성격 탓에 매번 클라이언트들의 현황을 여전히 까먹지만 말이다. 보완하기 위해 기록해놓은 데이터들을 자주 보며 리마인드 하고 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진행하는 세미나도 점점 빛을 발해 수익으로 이어지고 있고, 새롭게 진행하게 된 행사도 예상과 다르게 첫 회차부터 가능성이 크게 보였다. 진행자가 두명이지만 내가 거의 도맡아 진행할 예정이었어서 꽤 부담이었는데 괜찮았다. 내가 행사를 영어로 진행할 수 있다는 가능성도 보았다.
결국 이주공사의 세일즈&마케팅이란 영업이 중심이다. 멀리보는 마케팅과 가까이 있는 영업을 같이 하기 때문에 꽤나 신기한 포지션. 매번 실적을 신경써야 한다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하기도 하지만, 내가 잘한 만큼 그 실적이 숫자로 나오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피곤하면서도 짜릿한 직군이 아닐까싶다. 언젠가 영업을 꼭 해보고 싶었는데 운좋게 간접체험 할 수 있어서 좋다.
이렇게 영업과 마케팅을 동시에 하다보니 장기적인 관점에서의 마케팅은 하기 힘들다는게 단점이라면 단점. 예를 들면 PR을 통해 인지도를 쌓는다거나 하는 마케팅 말이다. 영어를 사용함에도 단점이 약간 있다. 일단 직원들이 한국인과 일본인이므로 서구식 업무적 표현을 사용하지 않는다. 클라이언트들도 이 곳에서 자라지 않은, 이민을 원하는 사람들이므로 서구식 표현을 하지 않는다. 정말 오피스(드라마)로 배워야하나? 뭐 당연히 사용하는 어휘만 빼면 문제가 없다. 외국인 클라이언트들과 고용주들이 50% 정도 되며 업무상 전화를 많이 하게 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사수를 정말 잘 만났다고 생각한다. 하하.
2. 임플란트 모델링
작년 3월부터 시작했으니 약 1년이 되었다. 사실 모델링이라고 거창한 이름을 지었지만, 내 주된 업무는 공차 수정이다. 그때그때 사장님께서 말씀해주시는대로 모델을 살짝씩 변경해서 메쉬를 입힌 후 STL 파일로 보내드리면 되는 간단한 일... 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간단하진 않다. 문제는 소통이다.
대부분의 회사들이 그렇 듯이 일반적으로 클라이언트들은 해당 기술에 대한 정보가 없다. 그래서 나의 업무도 이에 크게 영향을 받는다. 더욱다나 최상의 결과물 제작을 위해 끊임없이 미세하게 수치를 변경 후 실물로 제작하는 과정이라 더욱 심하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치원씨, 2번 원기둥을 0.5mm만 올려주세요."
그러면 나의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전체 길이는 줄어드나요? 전체 길이가 그대로이면 다른 부분이 줄어들어야합니다. 1번 원기둥을 줄일까요, 3번 원기둥을 줄일까요? 1번 원기둥 윗면 넓이를 그대로 한 채 길이를 줄이려면 각도가 줄어듭니다. 괜찮으신가요?" 등등.
그런데 이것을 Remote work로 하다보니, 더 큰 소통의 어려움이 있다. 자꾸 혼란이 계속되니 나의 실수도 늘고 작업도 여러번 하게 된다. 세번째 직업이라 시간을 많이 투자하지도 못할 뿐더러, 그만큼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니기에 신경을 많이 쓰기 어렵다. 스트레스는 스트레스대로. 작업량이 얼마 되지 않더라도, 퇴근 후에 집에 가서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끊임없는 스트레스가 날 괴롭힌 것이다. 단순 작업의 반복과 소통의 어려움으로 이미 지쳐버려 그만둘까 고민을 많이 했다.
사장님이 회사의 투자자인 치과원장님에게 소통을 맡기시면서 이 부분은 많이 나아졌으나, 여전히 압박감이 있다. 서빙을 그만두었으니 심적으로 나아질 것을 기대한다.
3. Research Assistant (MARI, Volunteer)
위 글에 적혀 있듯이, TechcareOnline 이라는 회사 인터뷰를 볼 때 MARI 라는 기관의 Volunteer work 를 추천 받았다. 지원해서 뭐 잃을거 있겠냐며 그때 쯤 결국 지원해서 면접까지 다 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찾아온 합격 소식과 몇 통의 이메일들. 답장을 했지만 별 다른 반응이 없었다. 나도 일을 시작하고 바쁜게 지낸 탓에 잊고 지냈다.
두 달 전 쯤이었을까? 뜬금없이 연락이 와서는 슈퍼바이저가 지정되었다. 그녀의 이름은 Parisa. 훗날 알게 되었지만 TechcareOnline 면접을 본 사람이었다. 그렇게 시작된 볼룬티어. 일반적으로 Research Assistant들은 Medical Article을 쓴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Medical Industry Background가 없고, Photoshop 을 다룰 수 있기 때문에 Video Editing 을 맡길 예정이라고 했다. 포토샵과 영상편집이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직도 모르겠으며 아쉬운 마음에 말했다.
"너 말대로 Background는 없지만, 이건 Volunteer work 이니 나도 Medical Article 쓰게해줘!"
Parisa 는 떨떠름해 하더니 검토해보겠다며, 일단 Video editing 관련 간단한 것 좀 해줄 수 있냐고 했다. 알겠다고 했다. 중학교 때 Vegas 열심히 공부하던게 이렇게 도움이 될 줄이야. 그렇게 차근차근 진행 중이다. PPT 만드는 것, PPT 설명을 영상으로, Medical article을 영상으로, 그리고 이제 직접 쓰는 단계까지. 솔직히 Article guide line 부터가 너무 어려운데, 어떻게 해봐야지. 언제 이런 일을 해보겠나.
아, 모델링과 볼룬티어는 공통된 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시차'. 한국과 벤쿠버는 섬머타임 기준 16시간, 런던(Parisa는 런던에 있다)과 벤쿠버는 8시간 차이가 난다. 런던이 진짜 문제인데, 이 곳 출근시간인 오전 9시가 런던에선 오후 5시라 퇴근 시간이다. Parisa 는 무슨 이유에선지 (기계일까?) 답장이 항상 바로바로 와서 다행이다. 늘 느끼지만 해외영업 하는 사람들은 정말 대단하다.
또 다른 근황은 체중 증가다. 나날이 인생 최대 몸무게 갱신 중. 지금 75kg에서 76kg 사이이니 여기 올때 69kg 에서 6~7kg 가량 늘었다. 물론 좋은 방향으로! 한동안 너무 바빠 스트레스 풀러 운동에 집중한 것도 있고, 룸메이트도 바디빌더라 영향을 조금 받았다.
물론 지금도 복싱은 놓지 않아서 웨이트 끝나고 꼭 복싱을 해준다. 그렇게 하다보면 내 복싱을 마음에 들어 하는 사람들이 와서 말도 걸고, 같이 운동하기도 하고 한다. 연락처 교환하고 가르쳐 주기도. 그러다 PT 해보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마침 서빙을 그만두면서 룸메이트형이 PT 클라이언트를 한 분 소개해줘서 진행해보려 한다. 인생 첫 PT를 외국에서 영어로...? 두렵지만 설렌다.
PT 벌이는 크지 않다. 아니, 내가 하는 모든 일들이 벌이가 크지 않다. 나는 초년생이기 때문이고 내 능력이 부족한 것을 안다. 경험이 돈이 된다는 말을 믿는다. 버는 만큼 일하지 말고, 벌고 싶은 만큼 일하라는 말을 믿는다. 뭐... 사실 일이 나쁘지 않다면 돈이 크게 문제가 되겠나. 하다보면 벌리는게 돈이지.
엄마아빠는 귀국할 때 여행계획을 세우라고 각각 연락이 오셨다. 생각이 일치하신 모양이다. 혹시 돈이 부족하다면 지원까지 해주시겠다고도 하셨다. 그 카톡들이 왠지 당신들은 이제 괜찮으니 너라도 많이 보고 배우고 오라는 말처럼 들렸다. 이제 반도 남지 않은 캐나다 생활. 너무 강렬하고, 인상적이고, 다시는 경험해보지 못할 것들을 많이 경험해서 절대 잊지 못할 듯하다. 이 순간을 죽을 때까지 그리워할게 눈에 선할 정도로.
마이엔트메리의 '공항가는 길'을 들으며 고속버스에 몸을 실은 나를 상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