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진짜 목소리로 말하고 있는 것들
*영화 <애프터썬(After Sun, 2023)>에 대한 약간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린 소녀가 사람들 무리와 함께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고 있다. 그 상대는 바로 소녀, 소피의 아빠. 그날은 그의 31번째 생일이었고, 소피는 주위의 낯선 사람들에게 몰래 부탁한 것이다. 오늘 저희 아빠 생일이에요, 같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주세요- 라고. 알 수 없는 오묘한 표정으로 생일 축하 노래를 들으며 서있던 그는 다음 장면에서 울고 있다. 침대에 걸터앉아 끅끅 우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는 왜 그렇게 눈물이 나든지. 영화가 끝난 이후에도 그 뒷모습이 계속, 계속 눈에 밟혔다.
처음에는 그저 소피의 성장 드라마 같은 이야기인 줄 알았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이상하게 그의 아빠에게 자꾸만 마음이 더 쓰였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하고 위태로운 느낌을 주며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그는 기어코 그 뒷모습으로 울었다. 동그랗게 굽어진 등으로 힘겹게 토해내고 있었다.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너무 어린 그는 어쩔 수 없어서 등으로 울었다.
어느샌가부터 내 주위에는 이제 어느 정도 사회생활에 익숙해진 사람들이 많아졌다. 다들 점점 사회적 가면을 쓰는 것에도 익숙해지고. 그래서 별생각 없이 보던 얼굴들 대신 이제는 그들의 뒤를 본다. 늘 웃기고 명랑하던 친구가 사실은 우울증 약을 먹은 지 꽤 된 것을 알고 난 후로부터 더더욱. 매번 유독 밝은 모습만을 보이는 친구를 보게 되면 내심 그의 뒷모습에 자꾸만 마음이 간다. 얼굴과 같은 앞모습으로는 언제든 아무렇지 않은 듯 속일 수 있어도, 뒷모습으로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기 때문에. 학창 시절 엄마는 내가 앉아 있는 뒷모습만 봐도 진짜 공부에 집중하고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다고 말하곤 했다. 그 땐 순 거짓말인줄 알았는데. 등으로 말하고 있는 것들에는 내가 가짜로 꾸며낼 재간이 없다.
일본의 오래된 영양식 '칼로리메이트(Calorie Mate)'는 광고에서 늘 사람의 뒷모습을 중요하게 다룬다고 했다. 칼로리메이트가 진짜로 어떤 제품인지는 패키지 뒷면의 영양 성분 표시를 통해 알 수 있듯이, 사람 역시 뒷모습을 통해 그의 삶의 방식을 알 수 있다고. 그래서 예전부터 칼로리메이트는 사람의 뒷모습에 집중하면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은 앞이 아닌 뒤를 통해 알 수 있다고 이야기해왔다.**
헤어질 때 두 가지 부류가 있다고 한다. 안녕, 인사를 하고 나서 뒤 한번 돌아보지 않고 가는 유형과 한번 뒤를 다시 돌아보는 유형. 원래 난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곤 했다. 괜스레 쑥스러우니까. 그런데 이젠 꼭 뒤를 돌아보게 된다. 헤어진 후 조금 있다가 뒤를 슬쩍 돌아 멀어져 가는 친구의 뒷모습을 본다. 내가 혹시나 못 보고 있는 것이 없도록, 놓치고 있는 것이 없도록 해달라고 간절히 바라면서.
문득 내 앞에서 설거지를 하고 있는 아빠의 등을 본다. 등이 왜 이렇게 굽은 것 같지, 동년배들에 비해 동안인 편이라고만 생각했는데. 20년 뒤 아빠가 찍은 캠코더 영상을 보며 그에 대한 기억을 더듬더듬 되짚어보던 31살 소피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아빠의 뒷모습을 보고 괜히 슬퍼지려 하는 느낌이 싫어서 설거지하던 그를 떠민다. 그만 가서 쉬어, 나머진 내가 할게. 등 좀 펴 그리고. 애꿎은 등 탓만 한다.
**스투시 작가의 <칼로리메이트는 왜 뒷모습을 광고에서 중요하게 다룰까?> 내용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