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는 것
임신해서 배가 남산만 할 때도 몸을 옆으로 돌려서 발톱을 혼자 깎았다. 남편은 말로는 만삭이 되면 발톱을 깎아 주겠다고 했지만, 그것도 내가 깎아줄 테냐고 물어보니 대답한 것이었고, 결국 출산할 때까지 먼저 나서서 내 발톱을 깎아주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나도 부탁하지 않았으니 우리는 서로 아쉬울 것도 없고 서운할 것도 없었다.
사실 발톱을 누군가에게 내밀고 맡긴다는 것이 매우 남사스러운 일이라서 돈 주고 발톱관리를 하러 가고 싶지도 않다. 발과 발톱이 너무 못난이라서 더욱 그렇다.
아이를 낳고 손톱과 발톱을 자를 때 초보 엄마들은 식은땀을 흘린다. 출산준비물로 사둔 손톱 가위를 들고 아이가 잘 때 꽉 쥔 주먹을 펴서 살살 자른다. 아프지 않게 그것들을 잘라내고 나면 얼마나 뿌듯한지 모른다.
아이들이 조금 큰 후에는 깨어있는 시간에 손발톱을 자르는데, 큰 아이는 흔쾌히 손발톱을 나에게 내주었던 반면 둘째 아이는 불안이 많아서인지 손발톱을 자르지 못하게 했다. 조금 컸을 때는 손톱은 자르게 해 주었지만 특히 발톱을 자를라치면 무섭다고 도망 다녔기에 5살이 되도록 아이가 잘 때 조심조심 발톱을 잘랐다.
이제는 제법 컸다고 발톱 자르는데 겁을 내지는 않고, 얼마 전부터는 스스로 손톱과 발톱을 자르기 시작해서 그냥 두었다. 자기 몸이라 그런지 여태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깔끔하게 잘 자른다.
자기의 몸을 소중하게 정돈하는 행위가 스스로를 사랑하고 있는 마음이라고 여긴다.
얼마 전 식탁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데 이호가 굳이 식탁 밑에 들어가서 자기 발톱을 깎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엄마 발톱을 보더니 깎아주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응? 내 발톱을 깎겠다고? 순간 나는 너무나도 무서웠다. 손톱깎이를 내 발톱에 들이대는 아이에게 공포심을 느꼈다. 어린 시절 이호가 무섭다고 도망 다니던 심정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타인이 발톱을 깎아주는 게 무서울 수 있구나, 그때는 엄마 못 믿냐, 왜 무섭냐, 이랬던 내가 말이다.
아이가 깎아주고 싶어 하는 것을 매몰차게 뿌리칠 수도 없는 노릇이라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그래 한 번 깎아줘 봐. 너무 바짝 자르는 거 싫으니까 넉넉하게 남기고 잘라줘."라고 말하며 발을 그에게 맡겼다.
엄마발을 잡고 발톱을 살살 깎는 아이의 손길을 느끼니 갑자가 마음이 보송보송 울렁울렁거렸다.
남의 보드라운 손길, 좋구나.
그렇게 십 분 정도 아이는 집중해서 나의 발톱을 잘라주었다.
뿌듯한 아이의 표정을 보니 나는 왠지 안도감을 느꼈다.
발톱을 맡긴다는 것은 상대방을 믿는다는 것이다.
내 못난이 발을 보고도 속으로 욕하지 않을 것을 알아야만 맡길 수 있다. 피를 보지 않고 잘라줄 것이라는 믿음 또한 있어야 한다. 어린 시절 이호에게는 엄마를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있었던가, 하는 마음이 들었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으니, 나를 믿어준다는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하는 마음을 느낀다.
나는 부모님의 발톱을 잘라준 적이 없다. 하지만 살다 보면 연로하신 부모님의 손발톱을 잘라드릴 일이 왜 당연히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내가 부모님의 발톱을 잘라주게 된다면, 그때의 내 마음은 어떨지 아직은 잘 모르겠다. 살갑지 않은 딸에게 발톱을 선뜻 맡겨주실까도 의문이고 말이다.
나의 가장 못난 부분을 눈과 코 가까이까지 들이밀어 세심히 살펴야 하는 발톱 깎이라는 과정은 앞으로는 아이들이 자라나면 더욱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혹시 남편이 어느 날 나의 발톱을 잘라준다고 나선다면 기겁을 하고 도망 갈 것처럼 아이들도, 나도 서로의 발톱을 잘라주겠다면 기겁을 하고 도망을 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때는 무서워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일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나의 가장 못난 부분을 굳이 보여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이렇게 서로 조금씩 독립적인 타인이 되어 가겠지.
타인이지만 언제든 다시 발톱을 맡길 수 있는 타인 말이다.
그래도 나는 평생 아이들 발톱을 잘라줄 수 있을 것 같은데, 남편 발톱은, 좀 생각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