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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 Oct 25. 2023

교장선생님한테 말할 거야

"저 교장실 갈 거예요!"

십여 년 전 우리 반도 아닌 학부모가 8시 50분 우리 교실 앞문에서 소리를 질렀다.

"네."

하고 나는 앞문을 닫았다. 


여러 번의 소리 지르는 어머님들을 만났지만 이때만큼 마음이 잔잔했던 적은 없었다. 우리 반이 아니어서였을까. 

그녀의 분노는 4월 과학의 달 행사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당시 과학행사 담당을 맡고 있었던 나는 3월 말에 이미 전교생에게 과학 대회 안내를 했고, 신청서를 받았다. 그 아이는 아마 과학상자대회에 신청을 했던 모양인데, 대회 전날 친절하게도 아이들에게 다시 안내를 한 나의 잘못이었다.

갑자기 전날 대회를 재안내받은 아이의 엄마는 급하게 준비물을 사러 다녔지만 구할 수 없었고, 그 화를 다음날 아침 나에게 쏟아부은 것이다. 그러게. 미리미리 준비하셨어야죠 어머님.

다음부터는 한번 신청받았으면 대회날짜가 다가와도 재안내를 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정말 깜빡한 아이들에게 그 피해는 오롯이 돌아갈 텐데 어쩌나, 내 정신건강도 중요하니까. 


내가 학부모가 되고 아이는 2명 밖에 안되는데도 뭐가 그리 많은지 자꾸 깜빡거리게 되고 잊어버리게 된다. 심지어 나는 현재 워킹맘도 아닌데 말이다. 하이클래스는 전날 보고, 다음날 아침에 또 확인하지 않으면 뭔가를 빠트리는 일이 부지기수로 생기고, 애 물통도 안 챙겨서 보낸 날도 많다.


나와 비슷한 엄마들이 많은지, 10월의 어느 멋진 날, 1학년 담임선생님의 알림장은 거의 하소연급이다.

"어머님들 제출기한 꼭 확인하셔서 기한안에 제출해 주세요."

"수학 익힘 오늘 안 낸 친구 8명 내일까지 냅니다."

"실로폰과 악보 학교에 아직도 안 가져온 친구는 월요일까지 꼭 가져옵니다.(월요일 수업)"

"아침에 읽을 책 한 권 가방에 넣어주세요. 아침활동 시간에 책이 없는 친구가 많습니다."

"준비물을 안 챙겨 오면 아이가 속상해합니다. 알림장 확인 꼭 부탁드립니다."


매일매일 올라오는 알림장을 보다 보면 나도 같이 한숨이 나온다. 그래서 나는 근무할 때 숙제도 안 내주고 준비물도 웬만해서는 학교에서 해결하거나 그냥 내가 준비하고 만다. 그러니까 우리 집이 지저분한 거다. 플라스틱 컵커피도 씻어서 말리고, 요구르트 병도 버리지 않는다. 휴지심은 우리 집에서 버리는 물건이 아니다. 우리 집은 잡동사니가 많다. 내가 게을러서가 아니다. 그거 다 쓰레기 아니라고.


하지만 2명밖에 안 되는 아이를 챙기기에도 정신없다는 마음을 너무나 이해한다. 애엄마가 되고 나니 안 그래도 별로 좋지 않던 기억력이 더 나빠짐을 하루하루 실감한다. 정말로 며칠 전 일들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아이들이 가끔 "엄마 작년에 나랑 00이랑 이 옷 입고 엉덩이 춤춘 거 기억나?" 그러면 나는 항상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한다. "야, 내가 어제 일도 기억 안 나는데 일 년 전 일을 어떻게 기억해." 그런데 우스갯소리가 아니다. 정말 기억이 안 난다. 

치매 보험을 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얼마 전이다. 이러다가 치매에 걸리면 가족들에게 민폐를 끼치다가 쓸쓸하게 죽을 것 같아서 말이다. 내 머릿속의 지우개 손예진처럼 예쁜 것도 아닌데 치매까지 걸리면 어쩌나 싶다.




며칠 전 1학년 하교시간에 맞춰 교문 앞에 서있을 때 다른 반 엄마들이 하는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아니, 전학생을 계속 받으면 어떡하냐고. 애들 성비는 맞춰야 하는 거 아니야?"

"맞아. 우리 반만 애들 인원이 적다고 전학생 계속 우리 반으로만 들어오잖아."

"남자애들만 연속 3명째던데, 여자애들보다 남자애들이 6명이나 더 많아. 이게 말이되?"

"내가 교장선생님한테 전화하려고. 성비는 맞춰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다른 반으로 전학생 가야지 계속 우리 반만 전학생 오면 어떡하냐고."


이야기를 들으며 저 엄마들은 왜 성비를 중요하게 여길까 생각해 봤다. '나는 솔로'를 찍을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안 그래도 아이들이 많은 편인 우리 아이의 학교는 전학생도 계속 유입되는 곳이다. 그러니 처음 반배정할 때의 성비가 안 맞을 수도 있고, 사실 초등학교에서 성비가 왜 중요한지도 잘 모르겠다.(물론 남자아이가 많은 반보다 여자아이가 많은 반이 조용하고 학급 운영하기 편한 건 사실이다.) 그리고 성비를 제일 맞추고 싶은 건 담임선생님이지 않을까.

교장선생님에게 말하면 다 된다는 생각을 가진 엄마들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많구나. 교장선생님에게 말해도 별로 달라질 건 없다는 걸 모르는 엄마들도 여전히 많구나.


성비보다는 학생 인원수가 더 중요하기에 전학생은 인원이 적은 반에 우선 배정된다. 그걸 이해해 준다면 성비가 맞지 않아 속상한 엄마 마음을 조금은 다독일 수 있지 않을까. 

굳이 교장선생님과 소통을 하고 싶어 전화하는 거라면 딱히 말리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학급의 문제 행동을 일으키는 아이들도 모두 교장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돌아왔으면 좋겠... 음.. 그럼 아동학 댄가? 우리 애 마음 상해죄.

마음이야 누구에게라도 어디서라도 상할 수 있고, 그것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나마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속상한 경험을 해보는 게 꼭 나쁘다고는 할 수는 없을텐데, 조금이라도 불편한 걸 참지 못하는 건 어쩌면 아이들이 아니라 엄마들 아닐까. 





대문 사진 출처 : 안녕자두야 교장 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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