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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pr 24. 2022

더욱 진한 기억으로 내 안에 남아주기를

그랜드 캐니언

앤틸로프 캐니언에서 3시간 정도를 달려 기나긴 그랜드 서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인 그랜드 캐니언에 도착했다. 그랜드 캐니언은 이름대로 규모가 거대하고 웅장해서 실제로 보면 압도되지만 사진으로는 잘 느낌을 전하기가 어렵다. 이런 상황은 예전에 페루의 콜카 캐니언을 갔을 때도 이미 한번 겪었던 지라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또다시 밋밋한 사진들을 보니 어째 서운하다. 지금 내가 본 풍경과 느낀 감정들을 잡아두려는 것 자체가 지나친 욕심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번에는 좀 다를까 싶어 뷰 포인트를 갈 때마다 이리저리 카메라만 들이댔다 실망하기를 반복했다.


§ 앤틸로프 캐니언에서 그랜드 캐니언으로 이동하면 중간에 데저트 뷰 포인트를 비롯해 다양한 뷰 포인트들을 거쳐가게 된다. 가는 곳마다 숨 막히는 풍경에 탄성이 절로 나오지만 사진에서는 규모를 전혀 느낄 수 없고 그저 붉은 계곡이 자그맣게 찍혀있을 뿐이어서 무척 안타깝다.


그랜드 캐니언의 4월은 바람이 무척 세다더니 기껏 예약한 경비행기 투어가 강풍으로 취소되어 시간이 여유로워졌다. 우리는 캐니언 남쪽의 사우스 림에서 시작하는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을 따라 캐니언 아래를 하이킹하기로 했다.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은 다 걸으려면 1박 2일이 걸리는 긴 코스라 우리는 첫 번째 쉼터까지만 가볍게 다녀오기로 했다. 길이 크게 험하거나 가파르지는 않은데 모래가 많아서 무척 미끄러웠다. 캐니언 아래까지 걷게 될 줄 모르고 적당히 스니커를 신고 온 탓에 더 미끄러워 온 다리에 힘을 주고 걸으니 시간도 체력도 배로 소모가 됐다. 문득 오래전에 본 영화 <라스트 모히칸>에서 원주민에게 잡힌 백인 여자가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던져 자살하는 장면이 떠올랐다. 이런 산과 협곡이 많으니 그런 장면이 나오는 것도 당연하다 싶어 혹여 굴러 떨어질까 조심조심 걷는데, 저 멀리서 한 사람이 치마 차림에 슬리퍼를 신고 성큼성큼 걸어와 내 옆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괜히 머쓱해져 조금 속도를 내보려 했지만 그러다 발목이라도 삐끗할까 싶어 포기하고 그냥 천천히 걸었다.


§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 쉼터에서 바라본 풍경. 흰 구름이 캐니언에 그늘을 드리우며 서서히 지나가고 있었다. 구름이 느리게 움직여서 바람이 좀 잦아들었나 싶었는데 나중에 캐니언 위로 올라가보니 여전히 강풍이 몰아치고 있었다. 그러나 캐니언 아래쪽은 파도와 상관없이 늘 잔잔한 깊은 바닷속처럼 무척 평화롭다.


사실 그랜드 캐니언을 하이킹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은 낙상보다 탈수로, 트레일에는 충분한 휴식과 수분 섭취를 권하는 경고문이 구토를 하는 람의 적나라한 그림과 함께 붙어있다. 실제로 더운 여름에는 탈수로 인한 사고가 빈번히 발생한다고 한다. 우리도 잘 모르고 물을 부족하게 가져온 탓에 도중에 물이 다 떨어져 옆사람에게 물 동냥을 해 겨우 목을 축이고 다닐 수 있었다. 하이킹을 마치고 돌아오자 얼추 저녁시간이 다가와서 선셋 투어를 하러 집합장소로 찾아갔다. 경비행기 투어가 취소되어 아쉬운 마음에 예약했는데, 군용 차량인 Hummer를 타고 간다기에 일반 차량은 갈 수 없는 곳에서 선셋을 보는 건가 싶어 기대했으나 그냥 일반 도로를 달려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곳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어서 적잖이 실망했다. 물론 중간중간에 캐니언의 지질학적인 특징이나 식생 등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점은 좋았으나 기대가 컸던 탓인지 투어 자체는 그다지 감흥이 없었다.


§ 해질 무렵의 그랜드 캐니언. 계곡은 석양을 받아 한껏 붉은 기를 더하는데 하늘은 짙은 구름이 덮여있다. 그런데 잔뜩 흐린 하늘이 캐니언과 묘하게 어울려 더 근사해 보인다. 역시 하늘은 구름이 조금 있어야 더 예쁘다.


그러나 일몰만큼은 너무나 아름다웠는데 붉게 물든 지평선 아래로 겹겹의 협곡이 수묵화처럼 끝도 없이 펼쳐진 풍경은 도무지 이 세상의 일부가 아닌 것만 같다. 하늘에 구름이 많아 일몰을 보지 못할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 바람이 많이 불고 날이 추워 담요를 두르고도 덜덜 떨어야 했지만 그 모든 것을 감수할 가치가 있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일몰을 보는 것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였는데 이렇게 또 하나를 이루게 되었다는 사실에 괜스레 가슴이 벅차올랐다.


§ 그랜드 캐니언의 일몰. 이제 미국에서 일몰은 그만 봐도 될 것 같다. 다 이루었다.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다시 한번 사진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공간감을 뺏긴 2차원의 사진들은 다시 봐도 여전히 허전하다. 나는 서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풍경을 다 담을 수 있는 매체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약간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시간이 지나고 구체적인 부분이 희미해질수록 오히려 느낌은 더 진하게 남기 때문이다. 언젠가는 오늘 걸었던 길의 이름도, 보았던 협곡의 생김새도 잊혀 가물가물 하겠지만 오늘의 벅차올랐던 감동과 행복했던 기억만은 생생히 살아 있을 것임을 나는 안다. 세월과 함께 내 안에서 더욱 진해질 소중한 기억들에 감사하며 그랜드 서클 여행의 마지막 일정을 마무리했다.


§ 브라이트 엔젤 트레일을 하이킹하며 찍어본 동영상. 그나마 사진보다는 조금 더 생동감 있게 풍경을 담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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