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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pr 22. 2022

물결치는 바위의 파도 속에서

앤틸로프 캐니언

오늘은 아침이 한결 여유롭다. 모뉴먼트 밸리에서 다음 목적지인 앤틸로프 캐니언까지의 이동시간이 시간 정도라 비교적 가까운 데다, 앤틸로프 캐니언이 위치한 애리조나주가 DST(Daylight Saving Time, 한국에서는 서머타임이라고 부른다)에 참여하지 않아 발생한 시차 덕분에 시간상으로는 한 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침대에서 늑장을 부리니 그동안 장시간 운전과 수면부족, 하이킹으로 누적된 피로가 조금은 가시는 듯하다. 우리는 느긋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투어 예약시간에 맞춰 호텔을 나섰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나바호 원주민 보호구역이라 개인적으로 다닐 수 없고 반드시 투어에 참가해야만 한다. 오전 중에 가야 어퍼 앤틸로프 캐니언 틈으로 쏟아지는 빛을 볼 수 있어 좋다는 말에 조금 더 비싼 돈을 지불하고 좋은 시간대로 예약을 다. 듬직한 체구의 원주민 청년이 모는 트럭을 타고 붉은 모래먼지가 이는 울퉁불퉁한 길을 15분 정도 달리자 앤틸로프 캐니언이 나타났다. 제법 더운 날씨였는데도 캐니언 안은 해가 들지 않는 탓인지 안으로 들어서자 마자 서늘한 공기가 단숨에 폐 속으로 파고든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폭이 좁아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걷는 느낌인데, 모퉁이를 돌때마다 상상조차 못한 풍경이 눈앞에 펼쳐져 환상의 세계 속 어딘가에 온 듯도 하고 또는 신화에 나오는 미로에 빠진 듯한 기분도 든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마법에 걸려 순식간에 바위로 변하기라도 한 듯 부드러운 곡선이 물결치는 캐니언의 모습이 말할 수 없이 신비롭다.


§ 앤틸로프 캐니언은 세계에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장소라고 하고 윈도우 스크린 세이버의 사진 중 하나도 이곳에서 찍혀 아주 비싼 값에 팔렸다고 한다. 캐니언 자체가 너무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워서 어디에 카메라를 들이대도 아주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다.


가이드 청년은 사진 찍기 좋은 곳이 나타날 때마다 능숙하게 포인트를 잡아주기도 하고 사진을 찍어 주기도 하면서 재미있게 투어를 진행했다. 공기 중에 미세한 먼지가 있어야 빛이 잘 보이기에 햇빛이 쏟아지는 곳에서는 열심히 모래를 뿌려주는 센스를 발휘하며 관광객들이 근사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애써주는 것도 고마웠다. 이곳은 촬영을 목적으로 작심하고 각종 카메라를 이고 지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많아서 적극적으로 협조해 주지 않을 수 없는 분위기이도 하다. 이 중 누군가의 사진이 어디선가 고가에 거래될지도 모르는 일이니 모래먼지가 좀 날리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수밖에.


§ 앤틸로프 캐니언의 틈으로 쏟아지는 빛줄기가 마치 신의 은총처럼 경이롭고 아름답다. 이 빛줄기를 타고 하늘에서 천사라도 내려올 것만 같은 풍경이다.


§ 사진이 잘 나오는 포인트를 샅샅이 꿰뚫고 있는 가이드 덕분에 인생 사진을 많이 건질 수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마스크 때문에 다 망쳤다. 미국 대다수 지역이 더 이상 마스크를 강제하지 않지만 나바호 자치국만은 예외이다. 코로나가 한참 심각할 때 원주민이 3천 명이나 사망했기 때문인데, 얼마 남지 않은 원주민 인구를 생각하면 이토록 엄격하게 관리하는 것이 충분히 이해가 간다.


앤틸로프 캐니언은 그리 크지 않아서 투어가 길게 진행되지 않았음에도 무척 만족스러워서 즐겁게 관람을 마치고 나와 다음 목적지인 홀스슈벤드(Horseshoe Bend)로 향했다. 글렌 캐니언 댐과 파월 호수의 약간 아래쪽에 위치한 홀스슈벤드에서는 말발굽 모양으로 둥글게 돌아 흐르는 콜로라도 강을 볼 수 있는데 사진으로는 둥근 모습을  완벽하게 다 잡기가 어렵다. 그래도 사람들은 저마다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열심히 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모처럼 만난 따듯한 날씨와 걷기 쉬운 평지에 여유로운 일정까지 더 하니 기분이 좋아져 한 걸음 한 걸음 내딛는 발걸음이 가볍다. 홀스슈벤드에서 가벼운 산책을 마치고 근처의 글렌 캐니언 댐으로 향했다.


§ 신기할 정도로 동그란 모양으로 강이 굽이쳐 흐르는 말발굽 모양의 홀스슈벤드.


글렌 캐니언 댐은 굉장히 거대하기는 하지만 인공 구조물에서 대단한 감흥을 느끼기에는 요 며칠 경이로운 대자연을 많이 본 탓일까 '와, 크다!'라는 생각 외에는 별 느낌이 없었다. 우리는 댐 주변을 좀 걷다가 조금 일찍 하루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다. 연이은 고된 일정으로 지친 탓에 휴식이 필요하기도 했다. 이제 기나긴 그랜드 서클 여행도 마지막 일정인 그랜드 캐니언만을 남겨두고 있다. 지금껏 큰 탈 없이 다닐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이 행운이 조금만 더 오래 지속되어 끝까지 어디 다치거나 아프지 않고 여행을 마칠 수 있기를 바랐다. 나의 이 작은 바람이 앤틸로프 캐니언의 빛줄기를 타고 하늘에 닿았를 바라며 이른 하루를 마무리 했다.


§ 거대한 글렌 캐니언 댐. 물론 이 댐을 만든 인간의 기술도 위대하지만 대자연의 솜씨와는 비교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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