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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pr 19. 2022

매일이 빛나는 새 날이기에

아치스와 모뉴먼트 밸리

동이 트기가 무섭게 채비를 마치고 아치스로 향했다. 아치스의 입장권은 한 시간 단위로 예약이 가능한데 예약 시간이 지나면 입장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늦지 않게 들어가려면 서둘러야 했다. 다행히 시간이 일러서 그런지 입구에 대기하는 차가 많지는 않다. 공원에 들어선 후 파크 애비뉴와 라 살 마운틴 뷰 포인트 등을 차례로 지나 랜드 스케이프 아치로 향했다. 더블 오 아치가 유명하다고 해 가보고 싶었으나 트레일이 길고 험하다고 하여 포기하고, 대신 비교적 짧고 쉬운 트레일인 랜드 스케이프 아치까지만 하이킹하기로 했다. 걷기 시작하자 조금씩  몸에 열기가 돌면서 쌀쌀한 아침 공기가 상쾌하게 느껴진다. 가느다란 바위로 아슬아슬 이어진 랜드 스케이프 아치를 보고 나와 근처에 있는 스카이라인 아치까지 가볍게 둘러본 후, 오늘의 가장 큰 목적지인 델리케이트 아치로 향했다.


§ 스카이라인 아치와 랜드 스케이프 아치. 눈으로 보면 근사하지만 사진으로 찍으면 그냥 구멍 뚫린 바위로 밖에 보이지 않아 안타깝다.


델리케이트 아치로 향하는 트레일은 좀 더 험난하다. 왕복 2~3시간 코스로 아주 긴 트레일은 아니지만 바위산의 경사가 가팔라 천천히 걸을 수밖에 없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바위가 미끄럽지는 않아서 운동화를 신고도 많이 힘들지 않게 오를 수 있었다는 것과 트레일의 풍경이 너무 아름다워서 피로를 조금이나마 덜 느낄 수 있었다는 정도일까. 트레일을 오르는 내내 저 멀리 꼭대기에 흰 눈을 이고 있는 라 살 마운틴이 붉고 건조한 아치스의 기암괴석들과 대조를 이루며 이색적이고 신비로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한참을 오르면 드디어 거대한 델리케이트 아치가 모습을 드러낸다. 지금까지 본 아치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푸른 하늘 아래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거대한 델리케이트 아치를 보는 순간, 여기까지 오느라 흘린 땀과 수고는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경이로움만이 남는다.


§ 유타주의 자동차 번호판에까지 그려져 있는 델리케이트 아치. 실제로 보면 충분히 그럴만하다는 생각이 들만큼 아름답다. 모두들 차례로 아치 안에 들어가서 사진을 찍는데 아치가 워낙 거대해서 사람은 콩알만 하게 나온다.


오후에 모뉴먼트 밸리로 이동해야 하기에 델리케이트 아치에서의 감동을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모뉴먼트 밸리까지는 3시간 정도의 거리로 쉬지 않고 달려야 밸리드 로드의 마감 시간인 4시 전에 도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모뉴먼트 밸리까지 가는 길 역시 설산과 바위산이 번갈아가며 나타나 여러 번 눈을 사로 잡지만 지체할 여유가 없어 안타까운 탄성이 섞인 한숨만 내쉬며 지나쳐야 했다. 그러다가 길게 뻗은 도로 저편으로 마법의 도시처럼 모뉴먼트 밸리가 어렴풋이 나타나자 다시금 가슴이 뛰기 시작한다. 마치 이제 막 여행을 시작한 사람처럼.


§ 길 위에서 바라본 모뉴먼트 밸리의 모습. 길이 늘 이렇게 한산한 것은 아니어서 재빨리 한 장 찍고 도망쳐 나왔는데 운 좋게 사진이 잘 나왔다.


밸리드 로드의 입장 마감 시간을 10분 남기고 간신히 모뉴먼트 밸리에 도착한 우리는 지도를 보며 거대하고 진기한 바위들을 차례로 둘러보기 시작했다. 투어에 참가하지 않으면 갈 수 있는 곳은 한정적이라 코스가 길지는 않은데, 길이 비포장도로라 속도를 낼 수 없어 한 바퀴 돌아보는데 2~3시간 정도가 걸린다. 끝도 없이 펼쳐진 대지위에 누가 일부러 빚어 놓기라도 한 듯 다양한 모양으로 솟아 있는 바위를 보며 이 돌들도 울산바위처럼 제각각 사연을 품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이곳이 나바호 인디언들의 오랜 성지라고 하니 분명 많은 전설들이 전해 내려올 것 같은데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안타깝다. 누군가 연주를 하고 있는지 나바호 인디언의 북소리가 둥둥둥 울려 퍼지며 나의 상상을 자극한다. 나는 바람결에 실려온 북소리에 혹시나 옛이야기가 담겨 있을까 하는 마음에 한참을 그곳에 서서 귀 기울이며 풍경을 바라보았다. 


§ 모뉴먼트 밸리의 그림 같은 하루. 왼쪽 상단부터 차례로 한낮, 해질 무렵, 해가 진 후. 그리고 밤의 풍경. 모든 바위가 다 특색 있지만 벙어리장갑 모양의 웨스트 미튼, 이스트 미튼 바위가 제일 마음에 들어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모뉴먼트 밸리에서는 공원 안에 있는 더 뷰 호텔에 묵었기 때문에 밖으로 오갈 필요가 없어 마음이 한결 여유롭다. 더 뷰 호텔은 이름대로 뷰가 정말 예술이라 식당에서도 베란다에서도 모뉴먼트 밸리의 상징인 웨스트, 이스트 미튼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는 모뉴먼트 밸리를 배경으로 별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도 장점이다.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친 후 담요를 둘둘 말고 베란다로 나와 오늘도 여전히 하늘을 가득 메운 별들을 바라보았다. 브라이스 캐니언과 달리 함께 구경하는 이는 없지만 수많은 별들이 함께 하기에 전혀 외롭지 않다. 나를 만나기 위해 빛의 속도로 수백 년을 달려온 고마운 별빛들에게 밤 인사를 보내고 방으로 들어왔다.


§ 더 뷰 호텔 베란다에서 휴대폰으로 촬영한 별 사진. 프로페셔널 모드를 사용해 ISO를 1600~3200, 셔터 스피드를 20~30초, 수동 초점으로 설정하면 성능이 뛰어나지 않은 휴대폰으로도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별 사진을 찍을 수 있다.  6월에 이곳에 오면 은하수 사진도 찍을 수 있다고 한다. 다만 여름의 한낮에는 화씨 100도의 더위를 감수해야 한다는 것이 함정.


다음 날 아침 역시 베란다에서 일출을 감상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미국에서 여러 번 도전했지만 실패한 일출을 그랜드 서클에서 드디어 성공한 셈이다. 그것도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완벽하게 둥근 태양을 맞이하니 뭐라 말할 수 없는 감동이 밀려온다. 매일 뜨고 지는 태양이 어제와 다를 리 없음에도 의미를 부여하며 기뻐하는 것은, 길고 시린  밤이 지나갔다는 안도와 오늘은 더 좋으리라는 희망이 뒤섞인 막연한 기대감 때문이리라. 때로는 반복되는 일상이 지겨울지라도 어제와 다른 오늘이 기다리고 있음에 감사하게 되는 순간이다. 한때는 어김없이 찾아오는 아침이 원망스럽기도 했었다. 앞으로도 그런 날이 또 오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도 없다. 혹 만일 그런 날이 다시 온다면 오늘 이곳에서 바라본 태양을 떠올리며 되새기고 싶다. 어제의 슬픔에 절망할 필요가 없음을. 매일이 빛나는 날이기에.


Tomorrow is another day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른다


§ 모뉴먼트 밸리의 일출. 'At the crack of dawn'이라는 표현대로 어둠이 쪼개진 틈으로 찬란한 빛이 쏟아지는 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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