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더스크 Apr 17. 2022

로드 트립의 맛

아치스 캐니언

큰일이다. 어제 브라이스 캐니언에서 기분 좋게 잠이 들었는데, 시차로 인해 새벽 일찌감치 눈이 떠져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남편이 아치스 캐니언은 사전에 예약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것으로 방침이 변경되었다는 소식을 우연히 접하고 황급히 나를 깨웠다. 당황해 부랴부랴 미국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확인해 보니 공교롭게도 딱 사흘 전부터 방침이 바뀐 모양이다. 물론 미국 국립공원 홈페이지에는 진작부터 안내가 되어 있었지만 나는 한국의 인터넷 정보를 주로 참고한 탓에 이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당장 오늘 아치스로 이동해야 하는데 당일 예약은 아예 불가능하니 무척 난감하다. 자칫하다가는 하루를 공칠 기세다.


그래도 죽으란 법은 없다고 잘 찾아보니 국립공원 홈페이지에서 다음 날 입장권을 전날 저녁 6시부터 예약할 수 있다고 되어있다. 아치스의 입장 예약 제도는 피크 타임 때 관람객 숫자를 통제하는 것이 목적이라 오전 6시 이전, 또는 저녁 5시 이후에는 자유롭게 들어갈 수 있다. 우리는 오늘 저녁 6시에 내일 오전 입장권을 예매한 후 해가 지기 전 두 시간 동안 공원의 일부를 둘러보기로 계획을 세우고, 여기서는 아예 여유 있게 출발하기로 했다. 일찍 가봐야 체크인도 못하고 공원에도 들어가지 못하니 서두를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눈이 떠진 김에 브라이스 캐니언에서 일출을 보고 호텔에서 아침 식사를 한 후 천천히 아치스로 출발했다. 기왕 이리된 거 한국에서 해보지 못한 로드 트립의 맛이라도 제대로 느껴보자는 생각에, 마음에 드는 풍경이 나타나면 무조건 차를 세우고 사진도 찍어가며 느긋하게 운전하니 아치스까지의 네 시간 거리도 별로 지루하지 않게 느껴진다.


§ 아치스로 가는 길에 만난 풍경. 유타주에는 유명 관광지가 아니어도 멋진 곳이 워낙 많은 데다, 센스 있게 이런 뷰 포인트마다 화장실을 마련해 주어 쉬어 가면서 풍경을 감상할 수 있다. 화장실 앞이 풍경 맛집인 셈.


오후가 되어서야 아치스 캐니언이 있는 모아브에 도착했다. 시간이 좀 남아 이리저리 알아보니, 근처에 <코로나 아치>라는 1~2시간 코스의 하이킹 트레일이 있다기에 숙소에 가기 전 잠깐 걷기로 했다. 코로나 아치로 가는 길의 왼쪽으로는 콜로라도 강이 흐르고, 오른쪽의 절벽에는 사람들이 아슬아슬 매달려 암벽 등반을 즐기고 있다. 코로나 아치는 아치스 국립공원만큼 알려지지 않아서 그런지 한산하면서도 기분 좋은, 그러나 제법 험난한 하이킹 코스였다. 계획대로 아치스 국립공원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 이곳의 풍경도 내 눈에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 이름은 마음에 안 들지만 풍경은 마음에 들었던 코로나 아치. 코스는 짧지만 길이 가파르고 험해서 오르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이킹을 마치고 숙소에 체크인을 한 후, 5시 50분부터 국립공원 홈페이지를 띄워놓고 대기하고 있다가 6시가 되자마자 내일 아침 입장권 예약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서둘러 아치스로 향했다. 해가 질 때까지 남은 두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이 봐 두어야 내일 일정에 차질이 가지 않을 터이다. 우리는 국립공원 입구의 지도를 참고해 아치스에서 가장 유명하면서도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밸런스드 록과 투렛 아치, 더블 아치스 등을 먼저 보기로 했다. 낮에 코로나 아치를 봤을 때는 그곳도 멋지다고 생각했는데, 아치스 국립공원에 들어오니 완전히 차원이 다른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웅장하면서도 독특한 바위들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탄성이 멎지 않는다. 나는 시간이 부족해 풍경을 즐길 새도 없이 서둘러 차를 몰면서 애꿎은 시곗바늘만 원망했다. 그나마 트레일이 짧고 험하지 않아 어두워지기 전에 계획한 아치들어찌어찌 모두 돌아볼 수 있었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 석양을 받아 붉게 물든 밸런스드 록과 홀로 앉은 까마귀. 캐니언들은 일몰 무렵에 보는 것이 가장 아름다운 것 같다. 오른쪽은 더블 아치스인데 마치 두 개의 눈처럼 보인다.


어두워진 국립공원을 뒤로하고 숙소를 향해 돌아오면서 길에서 바라본 풍경들과, 코로나 아치의 다소 투박한 풍경들과, 아치스 국립공원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들이 차례로 떠올랐다. 모든 풍경들이 각자의 매력을 지니고 있기에 비교가 무의미하지만, 길에서 무작정 차를 세우고 그저 바라보았던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의 풍경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물론 처음 보았을 때는 아치스 국립공원의 유명한 장소들에 눈길이 먼저 갔지만, 급히 봐서 즐길 새가 없던 탓인지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사진을 찍는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던 탓인지 가슴으로 느끼지는 못한 기분이다. 반면, 길에서 만난 풍경은 특별히 기이하지도 빼어나게 아름답지도 않지만 그 안에 내가 들어가 하나가 된 기분이었다. 이것이 로드 트립의 매력인가 보다. 길 위에 서는 것, 아니 길 속으로 들어가는 것. 때문에 오늘 아치스 국립공원을 제대로 보지는 못했지만, 나만의 여행을 충분히 즐겼기에 아쉬움보다 충만함이 더 크다. 내일은 또 어떤 길로 들어서게 될지 기대하며 나는 포근한 침대 속으로 파고들었다.


§ 코로나 아치를 오르는 길에 만난 풍경. 건조한 바위틈에서도 보라색 들꽃이 강인한 생명력을 자랑하며 피어난다. 트레일 중간에 철로가 있는데, 딱히 차단봉이 없길래 버려진 선로인 줄 알았더니 옆의 푯말에 기차소리를 잘 듣고 재빨리 건너라는 안내문이 붙어있다. 꽃도 사람도 강인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천조국의 위엄. 나는 이런 풍경이 좋다. 다듬어지지 않고 별로 찾는 이도 없는, 평온하고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배어있는 곳.

이전 02화 Something Good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