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이 아주 늦어서야 겨우 자이언 캐니언에 도착했다. 본격적인 그랜드 서클 여행의 시작이다. 라스베이거스에서 시작해 시계 방향으로 자이언 캐니언, 브라이스 캐니언, 아치스 캐니언, 모뉴먼트 밸리, 앤틸로프 캐니언, 그랜드 캐니언을 한 바퀴 돌아보고 다시 라스베이거스로 돌아오는 일정으로, 자이언 캐니언은 일종의 그랜드 서클 여행을 위한 관문 같은 곳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 라스베이거스까지 비행기로 이동하고, 렌터카를 빌리고, 한인 마트에 들러 음식을 사고, 다시 자이언 캐니언까지 4시간을 운전하니 서둘렀다고 생각했는데도 도착했을 때는 이미 밤늦은 시간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숙소로 <자이언 로지>를 예약하고 찾아갔는데 체크인을 하려 하니 예약자에 내 이름이 없단다. 알고 보니 <자이언 캐니언 로지>로 착각하고 잘못 예약한 것. 나는 이름을 비슷하게 지은 숙소를 원망하며 다시 부랴부랴 서둘러 내가 예약한 곳으로 찾아갔다. <자이언 로지>의 해 지는 풍경이 예쁘다고 해서 일부러2박이나 예약했는데 실수한 것이 속상하기도 하다.하지만 이제 와서 후회해야 아무 소용없기에 자이언 캐니언의 다른 일몰 포인트를 검색하고 일단 눈을 붙이기로 했다. 숙소에서 일몰을 못 보면 다른 데서 보면 되지 그렇게 맘 상할 일도 아니다. 몸이야 좀 수고스럽겠지만 예상치 못한 일들도 생기고, 또 어찌어찌 해결하는 맛이 있어야 여행이지.
§자이언 캐니언은 너무 거대해서 눈으로 보면 압도되지만 사진으로 보면 안타깝게도 그냥 바위산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미디어의 한계를 뛰어 넘고 싶다면 직접 캐니언을 찾아가 보고 걷고 느끼는 수 밖에 없다.
어제는 어두운 시간에 들어와서 몰랐는데 아침이 되어 숙소 문을 열자마자 눈앞에 거대한 산들이 펼쳐져 있다. 스위스에서도 문만 열면 보이는 산들의 풍경에 감탄했었는데, 푸른 들판과 설산이 어우러진 목가적인 풍경의 스위스와 달리 이곳의 산들은 험준한 바위로 이루어져 있어 보다 거칠고 강인한 인상을 준다. 자이언 캐니언에는 아이들도 갈 수 있는 짧고 쉬운 코스부터 전문적인 코스까지 다양한 트레일이 있다. 나는 리버사이드 트레일에서 하이킹을 시작해 강을 따라 걸으며 계곡 안으로 들어섰다. 리버사이드 트레일을 끝까지 가면 협곡인 내로우즈가 나오는데, 내로우즈에 가려면 강물 속을 걸어야 한다. 그렇다해도 방수 신발과 방수 옷 등 내로우즈 하이킹을 위한 도구를 빌릴 수 있기 때문에 젖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물이 너무 차가워서 한 여름에도 두 다리가 얼얼해진다는 말에 망설이다 결국 내로우즈 하이킹은 포기했다. 그랜드 서클 여행 첫날인데 괜히 무리하다 감기라도 걸려 나머지 일정을 망칠 수는 없으니 아쉽더라도 어쩔 수 없다.
§ 리버사이드 트레일의 풍경. 자이언 캐니언 트레일 중 가장 쉬운 코스라 누구나 어렵지 않게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끝까지 가면 더 이상 길이 없는 곳이 나오는데 거기서부터는 물속을 걸어 자이언 캐니언에서 가장 유명한 내로우즈까지 갈 수 있다.
장엄한 산을 바라보며 파란 하늘 아래를 걷는 기분이 무척 상쾌하다. 다만 계곡 아래에서는 아무래도 시야가 가려 캐니언 전체의 모습을 조망하기 어렵기에 하이킹을 즐기는 것으로 만족하고, 자이언 캐니언의 풍경은 오후에 캐니언을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오버룩 트레일에서 즐기기로 했다. 마침 오버룩 트레일에서 일몰을 보기 좋다고 하니 겸사겸사 잘 됐다. 그런데 어째 날씨가 심상치 않다. 오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맑고 푸르던 하늘이 오후가 되니 구름으로 덮이기 시작했다. 약간 걱정은 되었지만 그래도 일단 오버룩 트레일로 향했다. 오버룩 트레일은 길이 꽤 험하고 미끄러운 데다 한쪽이 절벽이라 한걸음 한걸음이 조심스럽지만 풍경이 너무 근사해서 발 밑의 아찔한 낭떠러지도 잊고 바라보게 된다.
§캐니언 오버룩 트레일에서 바라보는 전경. 아래에 보이는 지그재그 모양의 스위치 백 도로를 차로 오른 후 다시 한 시간 가량을 하이킹하면 이런 풍경이 기다리고 있다. 산세가 웅장해서 드라이브를 하며 바라보는 캐니언도 장관이다.
그런데 일몰 시간이 가까워 가는데도 구름은 사라질 기미가 없다. 나는 차라리 캐니언 아래의 다른 일몰 포인트로 가는 게 낫겠다는 생각에 서둘러 산 아래로 향했다. 간신히 시간에 맞추어 일몰 포인트인 다리에 도착하자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하늘은 주홍색으로 물들어 있고 석양을 받은 산은 붉게 불타오르고 있다. 너무 아름다워 현실감이 사라지는 풍경 앞에 다들 말을 잃고 조용히 하늘만 바라보고 있었다.
§자이언 캐니언의 그림 같은 일몰. 자연의 아름다움 앞에서 인간은 한없이 겸손해진다.
그랜드 서클 여행의 첫날은 완벽했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완벽과는 거리가 멀다. 숙소 예약도 잘못했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장을 보느라 늦었는데 여기에 더 큰 슈퍼마켓이 있어 허탈했으며, 아침에 준비가 늦어져 주차장이 꽉 차는 바람에 공원 앞에서 결국 차를 돌려 다시 버스를 타고 돌아가야 하는 등 실수가 한둘이 아니다. 그뿐인가. 가려던 식당은 마침 휴무일인 데다 트레일을 한 시간이나 오르고도 결국 캐니언 위에서는 일몰을 보지 못했다. 그럼에도 완벽하다고 느끼는 건 매 순간이 즐거웠기 때문이리라.
오후에 오버룩 트레일에서 본 한 커플이 생각난다. 캐니언을 내려보며 식사를 할 생각이었는지 도시락을 준비해 왔는데, 캐니언 위는 모래바람이 장난 아니게 불어서 눈을 뜨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그래도 커플은 굴하지 않고 꿋꿋이 앉아 모래가 반쯤 섞였을 도시락을 먹었다. 작년에 친구 집 옥상에서 루프탑 파티를 하겠다며 모인 날에 하필이면 태풍이 불어서,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요동치는 천막을 부여잡고 삼겹살을 구워 먹던 기억이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천막을 열면 비가 들이쳐서 열지도 못하고 연기에 눈이 매워 다들 눈물 범벅이 되어 삼겹살을 먹으면서도 그렇게 많이 웃은 적이 없을 만큼 즐거웠다. 나는 생각했다. 날이 맑았다면 50살까지 기억했을 날이 되었겠지만, 비바람이 몰아쳐서 100살까지 기억할 날이 되었다고.
오늘 도시락을 먹은 그 커플도 모래바람 덕에 더 오래 이 날을 기억할 것이다. 나 역시 온갖 실수들과 하늘을 덮은 검은 구름 덕에 어쩌면 자이언 캐니언을 더 즐겁게 추억할 수 있을 것 같다. 폭풍으로 엉망진창이 된 결혼식을 완벽하다고 말하는 <어바웃 타임>의 레이철 맥아담스처럼, 나의 자이언 캐니언에서의 하루는 완벽하지 않았기에 더 아름답게 저물어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