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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l 11. 2022

하늘을 담은 호숫가 길을 따라 걸으며

요세미티 국립공원, 첫째 날

시원한 강물 소리에 일찌감치 눈이 떠졌다. 호텔이 바로 강 옆에 있어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리는데도 신기하게 전혀 거슬리지 않는다. 알람이나 경적 소리였다면 분명 짜증스럽게 느껴졌을 텐데, 감각도 무뎌지게 하는 자연의 마법 덕분인지 달아난 아침잠이 아쉽기는커녕 상쾌하기만 하다. 나는 느긋이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고, 하이킹 도중에 먹을 샌드위치를 만들어 간식들과 함께 잘 챙겨 넣은 후 기분 좋게 공원으로 향했다. 그랜드 캐니언 여행을 다니며 하도 배를 곯은 터라 먹을 것 만큼은 야무지게 준비했다.


입장시간 예약제 덕분인지 공원 입구도 크게 붐비지 않는다. (요세미티도 아치스 국립공원처럼 피크 타임에는 Recreation.gov 에서 사전에 입장일을 예약해야 들어갈 수 있다. 입장권은 입장일부터 시작해 연속 3일간 입장이 가능하다) 그런데 웬걸. 주차장에 자리가 하나도 없다. 그랜드 캐니언 때를 생각하고 방심한 것과 지금은 방학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것이 큰 실수였던 모양이다. 우리는 한 시간이 넘게 주차장에서 방황하다 결국 멀찌감치 떨어진 곳에 적당히 차를 박아두고 셔틀버스로 돌아보기로 했다.


§ 요세미티의 대표적인 산 중 하나인 하프 돔(Half Dome). 거대한 돔을 반쪽으로 잘라낸 모습이라 하프 돔이라고 불린다. 푸른 하늘, 초록 들판, 야생화가 어우러져 완벽하게 아름다운 풍경이다.


원래의 계획은 주요 뷰포인트를 우선 돌아보는 것이었는데 주차장에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한 탓에 여유가 없어 일단 가장 쉬운 하이킹 코스인 <미러 레이크 트레일>부터 걷기로 했다. 이 트레일은 2~3시간 코스라 길이도 짧고 경사도 거의 없어 초보자도 쉽게 걸을 수 있다. 그랜드 캐니언에서 데인 경험을 바탕으로 이번에는 등산화를 챙겨 신고 와서 마음도 든든하다. 트레일을 걷기 시작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호수가 나타났다. 물이 아주 맑고 시원해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이 여럿 보인다. 투명하게 바닥까지 비치는 물속을 들여다보니 수영까지는 아니라도 하다못해 발이라도 담가 보고픈 충동이 일었다. 나는 내일 래프팅이라도 해야겠다고 다짐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미러 레이크 트레일(Mirror Lake Trail)을 걸으며 만난 풍경. 도중에 정말 거울처럼 풍경이 반사된 아름다운 호수를 만날 수 있다.


하이킹 코스 중에는 미러 레이크가 가장 아름답지만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을 때마다 눈에 들어오는 모든 풍경이 다 절경이다. 사실 요세미티 국립공원에 대해 많이 알아보지 않고 왔기 때문에 스위스 같은 느낌의 설산일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마주하니 단단한 화강암 산이어서 전혀 다른 느낌의 강인하고 장엄한 풍경을 자랑하고 있었다. 끊임없이 감탄을 하며 걷다 보니 지치기도 전에 하이킹이 끝난 느낌이다. 우리는 차를 세워둔 곳으로 돌아와 뷰포인트인 엘 캐피탄과 요세미티 폭포 등을 둘러보았다. 한편 요세미티 국립공원에서는 글래셔 포인트가 가장 유명한데 올해는 보수를 위해 트레일이 차단되어 갈 수가 없어 무척 아쉬웠다. 그러나 어디를 가든 한 조각의 아쉬움은 남아 있어야 더 애틋해지는 법이니, 이곳을 더 아름답게 떠올리라는 신의 배려라고 생각하며 너무 슬퍼하지 않기로 했다.


§ 요세미티 국립공원의 또 하나의 상징적인 산인 엘 캐피탄(El Capitan)과 스윙잉 브리지(Swinging Bridge)에서 바라본 요세미티 폭포. 사진이 작아서 폭포가 잘 보이지 않는다.


호텔에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러 입욕제를 하나 샀다. 객실에 버블 스파가 있어 입욕을 하면 하이킹의 피로가 좀 가실 것 같았기 때문이다. 향긋한 물에 몸을 담그고 달콤한 와인을 한 모금 마시니 온기가 돌면서 뭉친 근육이 솜사탕처럼 녹아내리는 기분이다. 적당히 기분이 좋아져 입욕을 마친 후 스테이크와 남은 와인으로 저녁식사를 했다. 끊임없이 재잘대는 강물 소리는 재즈 음악보다 흥겹고, 오는 길에 슈퍼에서 적당히 사온 고기는 질이 좋을 리 없는데도 이보다 근사할 수 없다. 게다가 와인은 한 방울이 아쉬울 정도로 맛이 있으니 내가 있는 곳이 천국이 아니면 어디일까 싶다.


§ 하이킹을 마친 후 남편이 만든 근사한 스테이크와 소노마의 와이너리 <Viansa>에서 사 온 피노 누아. 가니쉬로 쓸 야채가 없어서 구운 양파에 감자칩만 곁들이고 양념 챙겨 오는 것을 잊어 제대로 간도 하지 못했지만 그 어떤 고급 레스토랑에서 먹은 것보다 더 맛있는 저녁 식사였다.




자연은 행복한 자극으로 가득하다. 풀냄새, 새소리, 햇살과 바람의 손길, 달콤한 물, 아름다운 풍경들. 그래서인지 자연 속에서 순간의 감각에 충실할 때면 마음에 서서히 고요함이 찾아온다. 하이킹을 하며 느낀 평온함과 입욕 후의 노곤함이 더해 말할 수 없이 행복하다. 그러면서도 가슴 한편에서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슬쩍슬쩍 고개를 들었다. 한국으로 돌아갈 날이 가까워지면서 불안감이 더 자주 엄습한다. 이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떨치기 위해서라도 더 자주 자연을 찾아야 하려나보다. 나는 낮에 트레일을 걸으며 느꼈던 감정을 되살리려 노력했다. 행복의 유효기간이 이토록 짧음에 서글퍼하기보다, 작은 것에도 행복을 느끼는 법을 배워 조금씩 행복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창밖의 새소리에 귀 기울였다. 아, 어쩌면 저렇게 예쁘게 지저귈까! 이 찰나의 행복을 안겨준 새들 덕분에 오늘은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다. 내일은 또 다른 행복의 순간을 만날 수 있겠지. 이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행복을 느낄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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