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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l 19. 2022

동화 같은 하늘이 머무는 곳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

여행을 며칠 앞두고 있던 어느 날 이웃 도디에게서 급한 연락이 왔다. 그녀는 기록적인 폭우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의 도로가 유실되었다는 소식을 전하며 우리 여행에는 지장이 없는지 물어왔다. 부랴부랴 뉴스를 찾아보니 가뜩이나 기록적인 폭우로 강이 범람했는데 지구 온난화로 인해 산 위의 눈까지 너무 많이 녹아내리는 바람에 난리가 난 모양이다. 워낙 유례없던 일이라 TV에서는 시시각각 떠내려가는 집들과 무너져 내리는 도로의 영상을 보도하는 한편, 일시 폐쇄된 옐로우스톤 국립공원이 언제 복구될지는 알 수 없다는 안타까운 소식도 함께 전했다. 여행을 고작 일주일 앞두고 이런 일이 생겼으니 취소도 못하고 수시로 국립공원 홈페이지만 확인하다가, 기적적으로 우리가 가기 바로 전날 공원의 South Loop만 오픈한다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옐로우스톤은 숫자 8의 모양을 하고 있어 위쪽 동그라미는 North Loop으로 몬타나주에 가깝고 아래쪽 동그라미는 South Loop으로 와이오밍에 속해있다. 원래의 계획은 8자의 위, 아래를 다 보는 것이었는데 절반만 볼 수 있으니 굳이 옐로우스톤에 오래 머물 이유가 없다. 그런데 비행기표 변경은 어려워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옐로우스톤 바로 아래에 있는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에서 여유 있게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그랜드 티톤은 국립공원치고는 규모가 작은 편이고 바로 위 옐로우스톤에 비해 인지도가 떨어져서 그런지 한국에는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그림 같은 호수와 설산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공원이다. 우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솔트레이크시티까지 비행기로 이동을 한 후 차로 5시간을 운전해 해질 무렵이 되어서야 그랜드 티톤에 도착했다. 캘리포니아와는 완전히 다른 와이오밍의 광활한 대자연에 안 그래도 넋을 뺏겼는데 하늘까지 분홍빛으로 저물어 가니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다.


§ 제니 레이크를 건너는 보트와 하이킹 중에 만난 풍경. 다양한 들꽃을 볼 수 있다는 것이 여름 하이킹 만의 장점이다.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준비를 해 제니 레이크로 향했다. 배를 타고 호수를 건너면 제니 레이크 트레일을 따라 하이킹을 할 수 있다. 트레일 코스가 길거나 험하지 않고 산을 오를수록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이 조금씩 눈앞에 펼쳐져 크게 피곤함을 느끼지 않고 걸을 수 있다. 제법 더웠던 요세미티와 달리 이곳은 날씨가 꽤 선선해 덜 지치는 면도 있다. 아침 산행이 무척 상쾌하고 정상에서 바라보는 제니 레이크 전경도 가슴 시원해 기분이 좋다. 내려오는 길에는 작은 폭포인 <Hidden Falls>에 들러 휴식을 취했다. 요세미티 폭포만큼 크고 웅장하지는 않지만 물이 맑고 시원해 하이킹으로 더워진 몸을 식히기에는 충분했다.


§ 시원하게 물이 쏟아지는 Hidden Falls. 이름과 달리 딱히 숨겨져 있지는 않아서 구석구석 찾아가야 하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된다.


하이킹을 마치고 호숫가 벤치에 앉아 따듯한 햇살을 받으며 준비해 온 샌드위치로 점심식사를 했다. 미니 주방이 딸려있던 요세미티에서는 록 샌드위치라도 달걀이나 햄을 넣어 제법 그럴듯하게 만들어 먹었는데, 그랜드 티톤 공원 내 로지는 주방은커녕 냉장고도 없는 형편이라 남은 식빵에 샌프란시스코 호텔에서 챙겨 온 잼과 크림치즈만 발라 끼니만 간신히 때워야 했다. 그래도 시장이 반찬인 데다 풍경까지 근사하니 그마저도 꿀맛으로 느껴진다. 허기를 채운 우리는 이번에는 호숫가를 따라 걷기로 했다. 산으로 둘러 싸인 호수가 무척 아름다운데 풍경이 예쁜 곳에는 어김없이 해먹이 걸려 있거나 캠핑 의자에 앉아 쉬는 사람들이 있어 느긋이 풍경을 감상하기가 쉽지는 않다. 호수에는 패들보드나 카누를 즐기는 사람, 수영을 하는 사람도 여럿 눈에 띈다. 카누가 재밌어 보여 근처에서 빌릴 수 있으면 해보고 싶었으나 멀리 잭슨까지 가야 한다기에 그냥 포기하고 하이킹에 집중했다. 한편 걷다 보니 곳곳에 캐비닛이 있어 뭔가 했더니 피크닉용 음식 보관함이었다. 이 공원에 그리즐리 곰이 2천 마리 정도 있는데 한번 음식 맛을 보면 음식을 얻기 위해 사람을 공격할 수도 있어 물놀이하는 동안 곰으로부터 음식을 숨겨놓을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모양이다. 곰이 많은 곳에서는 곰 맞춤형 별도 시설이 필요하다는 재미있으면서도 오싹한 사실을 깨달았다.


§ 제니 레이크에 놓인 누군가의 패들보드. 저 커다란 걸 어떻게 싣고 다니나 했더니 튜브처럼 바람을 불어넣어 부풀리는 것이었다. 제니 레이크는 호수에 반사된 풍경이 예뻐서 걷는 재미가 있다.


한편, 길이 막힐 리 없는 이곳에 이상하게 내비게이션에 정체 표시가 나오는 구간이 있는데 그곳에는 반드시 무언가가 있다. 예를 들면 버펄로 떼. 잘 가던 차들이 갑자기 멈추면서 모두들 내려 대포만한 카메라나 망원경을 들고 몰려 가길래 영문도 모른 채 따라가 보았더니 수많은 버펄로 떼가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었다. 오래된 영화 <늑대와 춤을>의 한 장면이 떠올랐는데 이 영화는 와이오밍 주 바로 옆에 있는 사우스 다코타에서 촬영했다고 한다. 이 근방에 버펄로들이 워낙 많이 사는 모양이다. 드넓은 초원을 어슬렁거리는 버펄로 떼의 모습이 너무 목가적이고 아름다워 사진을 찍어 보려 했으나 줌 렌즈가 없으니 그저 풀밭 위 검은 점으로만 보인다. 나는 아쉬운 대로 가까이에 있는 녀석 한 마리만 사진에 담고 발길을 돌렸다. 그 후로는 정체 구간이 나올 때마다 기대에 부풀어 더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덕분에 곰이나 물새 떼 등의 다양한 동물을 볼 수 있었다. 누군지는 모르겠으나 처음 동물들을 발견하고 차를 멈춰 준 관찰력 좋은 여행객에게 감사를 보낸다.


§ 유유히 길을 건너는 거대한 버펄로. 처음에는 너무 신기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나중에 보니 호텔 앞에도 떡하니 앉아 있을 정도로 여기서는 흔한 동물이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코요테와 곰, 버펄로 등 다양한 야생동물을 만났다.


하루의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왔지만 여전히 눈앞에는 낮에 보았던 자연의 풍경이 아른거렸다. 옐로우스톤의 홍수 때문에 예기치 못하게 일정을 변경하게 되었지만 그 덕분에 또 다른 아름다움을 발견했으니 이 또한 행운인 것 같다. 어떤 일이든 그 일의 결과는 미리 알 수 없으니 좋은 일이라고 미리 들뜰 필요도, 안 좋은 일이라고 지나치게 좌절할 이유도 없음을 새삼 느낀다. 그저 주어진 상황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자연의 가르침에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며 피곤으로 무거워진 눈꺼풀에 힘을 풀어 잠이 찾아오기를 기다렸다. 감은 두 눈에도 여전히 그랜드 티톤의 동화 같은 하늘이 머물며 달콤한 자장가를 불러 주었다. 잠이 들 때까지 고요하고 또 다정하게.


§ 숙소였던 잭슨 레이크 로지에서 바라본 그랜드 티톤의 일몰. 미국에서 만난 또 하나의 초현실적이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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