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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Sep 27. 2022

푸른 하늘 들꽃이 그리운 날

마운트 레이니어 국립공원

시애틀 하면 대부분 가장 먼저 도시의 랜드마크인 스페이스 니들을 떠올린다. 길쭉한 원기둥 꼭대기에 둥글고 납작한 형태의 전망대가 붙어있는 스페이스 니들은 그리 높지는 않지만, 마치 UFO를 연상케 하는 모습으로 시애틀 다운타운 어디에서나 눈에 띄기에 도시의 상징이 되기에 충분하다. 이 스페이스 니들에 올라서서 전경을 바라보든, 혹은 케리 공원 등에서 스페이스 니들을 바라보든 도시 너머로 희고 높은 설산이 하나 우뚝 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통 산들은 산맥의 일부라 주변에 다른 산들도 같이 보이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 산은 독특하게도 홀로 서있어 신기하다 했더니 화산이란다. 그것도 활화산.


§ 스페이스 니들 전망대에서 바라본 시애틀 모습.  도시 너머로 레이니어 산이 홀로 우뚝 서있는 모습을 선명하게 볼 수 있다. 캐스케이드 산맥의 일부이지만 크기 때문인지 유독 이 산만 눈에 띈다.


이 산은 포틀랜드와 시애틀의 중간쯤 위치한 산으로 이름은 레이니어(Mt. Rainier)이다. 미국 본토 48개 주에 있는 산 중 가장 높다는 레이니어 산은 워낙 거대해 가까워 보이지만 사실 거리가 꽤 있어서 차로 2시간은 가야한다. 하지만 미국 기준에서 2시간이면 코앞인 수준이라 기왕 시애틀에 온 김에 레이니어 산에서 하이킹을 즐겨보기로 했다. 시애틀에서 왕복 4시간인데 렌터카 사무실이 9시에 문을 여는데다 오후 5시 30분이면 문을 닫기 때문에, 늦지 않게 돌아오려면 산에서 보낼 수 있는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다. 게다가 크루즈 승선시 코로나 음성 확인서를 제출해야 하기에 중간에 검사소까지 들러 가야 하니 - 그러나 귀한 시간을 쪼개 검사한 보람도 없이 크루즈에서는 음성 확인서를 보지도 않았다. 확진자가 끝도 없이 나오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 서둘렀다고 생각했는데도 산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점심시간이 가까워 있었다.


§ 스카이라인 루프 트레일 헤드에 있는 이 오두막처럼 생긴 건물은 삼림 정보센터로 여기서 레이니어 산의 지도나 트레일 정보 등을 얻을 수 있다.


원래는 레이니어 산에 도착하기 전 어딘가에 들러 간단히 요기를 하려 했으나 시간이 넉넉지 않아 산부터 가기로 했다. 레이니어 산에는 여러 트레일이 있는데, 그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기도 하고 리플렉션 호수나 파라다이스 뷰포인트와도 가까운 스카이라인 루프 트레일이 오늘의 목적지이다. 나는 트레일 헤드 근처에 차를 세우고 근처 매점에서 적당히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랜 후 트레일을 걷기 시작했다. 스카이라인 루프 트레일은 4~5시간 코스라 서둘러 시애틀로 돌아가야 하는 우리는 트레일을 완주할 수 없기에 시간이 허락하는 만큼만 걷기로 했다. 트레일에 들어서자마자 만년설을 머리에 인 거대한 레이니어 산이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 레이니어 산의 정상인 리버티 캡(Liberty Cap)이 푸른 여름 들판과 어우러져 무척 아름답다.


트레일을 따라 걸을수록 풍경이 시시각각 변하며 그림 같은 초원과 나무들, 산이 눈앞에 나타난다. 하늘은 이보다 더할 수 없을 만큼 맑고 푸르러 힘껏 뛰면 풍덩 하고 빠질 것만 같다. 현장학습을 나온 어린 학생들이 레인저를 따라 줄지어 걷다가 우리를 보고는 반갑게 인사한다. 산에서 만나면 누구나 친구가 되는 것은 만국 공통인가 보다. 고개를 어디로 돌려도 절경이라 나도 모르게 걸음이 더뎌져 가뜩이나 부족한 시간을 더 축내는 기분이다. 그래도 어차피 끝까지 가지도 못할 거라면 천천히 풍경을 즐기자는 생각에 억지로 속도를 내지는 않았다. 산을 좀 더 오르자 연보라색과 노란색 들꽃들이 초원을 덮어오기 시작했다. 야생화 하나 만으로도 여름에 산에 올라야 하는 이유는 충분하다.


§ 미국 국립공원 중 눈이 가장 많이 내린다는 레이니어 공원은 한때 남극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적설량이 많은 곳으로 꼽히기도 했다. 때문에 멀리 알래스카까지 가지 않고도 사철 만년설을 즐길 수 있는 곳으로도 알려져 있다.


이 트레일을 따라 계속 걸으면 야생화가 만개한 툰드라 지역을 지나 아름다운 머틀 폭포까지 볼 수 있다는데, 남의 속도 모르고 앞으로만 잘도 가는 시곗바늘이 야속할 따름이다. 나는 동짓달 허리를 베어내어 좋은 시간을 멈추고 싶은 마음을 노래한 황진이처럼 이 순간을 붙잡을 수 있기를, 땅을 접어 천리길을 한달음에 달리는 전우치처럼 휘휘 날아 이 공간을 모두 두 눈에 담을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인간의 감정이 개입할 틈을 조금도 주지 않는 무정한 물리법칙 앞에서 우리는 얼마나 무력한가. 나는 그저 이 풍경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어 한 걸음만 더, 한 걸음만 더 하며 버티다가 결국엔 뜀박질을 해서 차로 돌아와야 했다. 늑장을 부린 대가를 두 다리와 허파로 고스란히 치른 셈이다.


§ 어떻게든 눈에 더 담아 두고 싶었던 레이니어 산의 풍경. 이름 모를 보라색 들꽃이 바람에 살랑일 때마다 내 마음도 1인치씩 날아오르는 기분이다.


서둘러 시애틀로 돌아가는 길에 호수에 반사된 산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리플렉션 레이크에 잠시 들렀으나, 태양의 위치 탓인지 물결 탓인지 반사된 모습은 전혀 볼 수 없었다. 파라다이스와 근처 폭포 역시 차로 들러 보았으나 가뭄 탓에 물이 거의 없어 사진에서 본 것 같은 설산을 배경으로 한 시원한 물줄기를 보지는 못했다. 그러나 아쉬움을 따지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에, 보지 못한 것은 잊고 본 것을 잘 기억하기로 했다. 어쩌면 기억이야말로 시간을 붙잡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기억은 과거를 현재로 만드는 일이니까. 오늘의 이 기억을 춘풍 이불 아래 넣듯 마음속 깊은 곳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푸른 하늘 들꽃이 그리운 날 서리서리 펴야겠다. 그렇게 생각하자 차창 밖으로 멀어지는 레이니어 산이 조금 덜 아쉽게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으로 한번 고개를 돌려 바라본 풍경을 가슴속에 곱게 접어 넣었다.


§ 리플렉션을 전혀 볼 수 없어 안타까웠던 리플렉션 레이크.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에 찾아야 물결이 잔잔해 호수에 반사된 산을 선명히 볼 수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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