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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Jul 16. 2022

즐거움을 미루지 말 것

티톤 빌리지와 잭슨빌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에는 호수가 많아 주변을 둘러싼 설산들이 거울처럼 반사된 아름다운 풍경으로 유명하다. 비지터 센터에도 데칼코마니처럼 완벽하게 대칭을 이룬 사진으로 만든 엽서나 티셔츠를 많이 판매하고 있을 만큼 이곳만의 상징적인 풍경이다. 나는 그 풍경을 티톤에 도착한 첫날도 보고 그다음 날 아침 제니 레이크를 가는 길에도 보았다. 두 번 다 유명한 뷰 포인트인 옥스보우 벤드(Oxbow bend)와 잭슨 레이크 댐을 거쳐 갔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를 세워 사진을 찍으려 할 때마다 남편은 내일 또 올 테니 그때 찍자, 이따 오후에 또 지나갈 테니 그때 찍자며 일단 미루고 계획한 일정을 먼저 마치자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미룬 결과 원하던 사진은 단 한 장도 찍지 못했다.


§ 구름이 가득한 옥스보우 벤드의 풍경과 이미 해가 뒤로 넘어가버려 산들이 흐릿하게 반사된 잭슨 레이크 댐의 풍경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랗던 하늘이 오후에 갑자기 두터운 구름으로 뒤덮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잭슨 레이크 댐에서는 해가 뒤로 넘어가기 전인 오전에만 산들이 반사된 풍경을 볼 수 있다는 사실도 몰랐다. 결국 남은 것은 희뿌연 하늘의 사진과 청동기 시대 거울에 비친 것처럼 흐릿하게 반사된 산들의 사진이 전부이다. 물론 차 안에서나마 눈으로는 충분히 감상했고,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하든 호수에 비친 산들이 일렁이는 물결에 흐려지든 있는 그대로 아름답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기회의 신은 뒷머리가 없어서 한번 지나가면 잡을 길이 없다더니 두 번의 기회를 놓쳐버린 실수가 뼈아프다. 나는 그 무엇도 미루어서는 안 된다는 교훈을 얻고 그랜드 티톤을 떠나야 했다.


§ 그랜드 티톤과 옐로우스톤에 많이 파는 허클베리 초콜릿이 신기해서 한 번 사봤다. 잭슨에서는 날씨가 더워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미국은 하겐다즈가 싸서 좋다. 그나저나 연속되는 여행과 수영 탓에 손이 시커멓게 타버려 약간 창피하다. 아래는 잭슨 레이크 로지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풍경


이 지역은 허클베리가 유명한지 비지터 센터마다 보라색 초콜릿이며 팝콘 등을 판매하고 있었다. 괜히 신기해서 하나 사봤는데 맛은 제주도의 백년초 초콜릿과 비슷해서 새콤달콤하니 맛있다. 한편 그랜드 티톤 국립공원의 잭슨 레이크 로지에는 레스토랑이 하나 있는데 여기의 뷰가 그야말로 예술이다. 야외 테이블도 마련되어 있어 숨 막히는 절경을 감상하며 식사를 즐길 수 있다. 나도 처음에는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가 날씨가 너무 추워 실내로 피신해 창밖으로 풍경을 구경했다. 새콤한 칵테일도 햄버거도 의외로 맛있고 가격도 합리적이다. 그랜드 캐니언의 끔찍하게 비싸고 맛없었던 식사를 떠올리면 천사같이 느껴지는 곳이다. 그랜드 티톤에서의 마지막 식사를 제대로 즐길 수 있어 다행이다.


§ 티톤 빌리지의 귀여운 트램. 요렇게 생긴 트램을 타고 10분 정도 오르면 눈으로 뒤덮인 랑데부 포인트에 갈 수 있다.


그랜트 티톤 국립공원을 뒤로하고 나와 한 시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티톤 빌리지에 잠깐 들렀다. 이곳은 스키장으로 유명한데 한여름에도 만년설이 다 녹지 않고 남아있어 트램을 타고 정상인 랑데부 포인트까지 올라가면 설산을 바라보며 간단한 하이킹을 즐길 수 있다. 산 아래는 푸릇푸릇한 여름인데 고작 십 여분을 올랐다고 하얀 겨울 풍경이 펼쳐진다. 눈으로 뒤덮인 산뿐 아니라 깊고 푸른 하늘색마저 영락없는 겨울 하늘이라 상반되는 계절감이 묘하게 신기하면서도 오랜만에 만나는 한기가 반갑다. 산 정상은 제법 추워서 기모가 들어 있는 후드티를 입고도 쌀쌀하게 느껴진다. 우리는 추위를 피하려고 정상에 있는 카페에 들어가 와플과 따듯한 커피를 먹으며 몸을 녹였다. 달콤한 와플을 한 입 베어 물자 나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아무렴, 먹는 즐거움도 미루어서는 안 되지.


§ 랑데부 포인트에서 바라본 만년설. 마을 쪽을 내려다보면 이와는 전혀 다른 싱그러운 여름 풍경을 볼 수 있다.



힘겹게 찾아온 소중한 기회와 마찬가지로 그때그때의 감정 역시 미루어서는 안 된다. 슬픔을 미루어 제대로 애도의 시간을 거치지 않으면 더 극복하기 어렵고, 기쁨을 미루어 충분히 즐기지 못하면 회한이 남기 때문이다. 잘 알고 있지만 늘 잊곤 하는 이 진리를 여행에서는 더욱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일상과 달리 다음 일정이 끊임없이 기다리는 여행에서는 다음이란 좀처럼 찾아오지 않기 때문이다. 매 순간 즐거울 수 있는 모든 기회를 두 손 펼쳐 움켜쥐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그것이 아주 사소할 지라도. 나는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새삼스레 반가워 손을 뻗었다. 한여름 더위속에서는 한 줄기 바람이 곧 행복이기에. 지금 이 순간의 작은 행복이 이렇게 내 앞에 있다. 그러니 잡아야지. Seize the d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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