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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더스크 Aug 26. 2022

나의 가장 좋은 날들을 기다리며

차코벤 마야 유적지에서

바하마를 떠나 선상에서 하루를 보낸 후 드디어 멕시코 코스타 마야에 도착했다. 마야 유적을 보는 것이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이기에 기대가 무척 크다. 나는 코스타 마야 근처의 마야 유적지인 차코벤을 가는 투어를 진작에 예약해 둔 터라, 부지런히 아침을 챙겨 먹고 혹시 단체 여행 중 일행들에게 폐라도 끼칠까 괜한 노파심에 비상약까지 챙겨서 늦지 않게 집합 장소로 찾아갔다. 집합 장소에서 기다리던 가이드는 출발 시간까지 여유가 많으니 주변을 구경하다가 11시까지 돌아오라고 했다. 우리는 별생각 없이 룰루랄라 기념품도 구경하고 곡예를 부리는 사람들도 보며 놀다가 10시 50분에 집합 장소로 돌아왔다. 그런데 집합 장소에 아무도 없다. 어쩐지 느낌이 쎄했다. 누군가 쎄한 느낌은 과학이라 했는데 그 말을 믿고 서둘러 조치를 취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아직 시간이 남아서 그럴 거라고 철썩같이 믿었다. 결국 11시가 넘어도 아무도 나타나지 않자 당황해 익스커션 직원들에게 확인했고, 이미 15분 전에 가이드가 우리를 버리고 떠났다는 황당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인원체크도 하지 않고 출발시간보다 먼저 떠나버린 가이드에 대한 분노와, 어떻게 처리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당혹감과, 애초 이 여행의 목적이 마야 유적을 보는 거라 일찌감치 예약까지 해두었는데 모든 계획이 어처구니없이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그리고 이 구구절절한 상황을 설명할 수 없는 내 영어 실력에 가장 크게 좌절했다. 하지만 이대로 넋 놓고 있을 수도 없으니 되지도 않는 영어로 계속해서 항의를 했고, 투어 담당 직원은 한 시간 후 출발하는 다른 투어에 혹시 남는 자리가 있으면 끼워 주마고 약속을 했다. 나는 혹시나 또 출발을 놓칠까 불안해 자리를 떠나지도 못하고, 잔여석이 없지는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다음 투어를 기다렸다. 그래도 천만다행으로 버스에 두 자리가 비어서 뒤늦게나마 간신히 다른 투어에 끼어가게 되었다.


§ 차코벤의 마야 피라미드. 이 사진에는 비교가 되는 대상이 없어 크기가 실감이 나지 않지만 사람이 앞에 서면 비로소 규모가 느껴진다. 큰 계단 한 단이 성인 남성의 가슴~어깨 높이쯤 된다.


가이드 말을 들으니 원래 이 지역의 이름은 마후왈라인데 크루즈 회사들이 관광 목적으로 개발한 후 코스타 마야라고 이름 붙였다고 한다. 그래서 항구 근처에는 상점가와 수영장 등 놀이 시설이 있고, 항구에서 버스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마야 유적지인 차코벤을 돌아보는 투어 상품들도 여럿 있다.  버스로 이동하는 동안 가이드는 유창한 영어로 마야의 역사, 문화, 풍습 등에 대해 안내했는데, 마야가 오래전에 멸망했을 거란 일반인들의 생각과 달리 상당히 오랫동안 멕시코 정부에 항복하지 않고 버텨왔고 그 후손들도 아직 살아 있으며 마야어 또한 사라지지 않았다고 한다. 가이드 본인 역시 마야인의 후손으로 마야어를 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나의 무지에 부끄러워짐과 동시에, 한국에 있었다면 마야 문명에 대한 책이라도 읽고 왔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쉬웠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은 언제나 진실이고, 오늘 조금밖에 보지 못한다면 그것은 철저히 나의 무지 탓이다.


§ 울창한 나무 사이로 보이는 마야 유적. 눈앞에 아파트 3층 높이는 되어 보이는 나무가 있었는데 수령이 고작 3년밖에 되지 않았다고 해서 무척 놀랐다. 이 지역의 수많은 유적들이 오랫동안 밀림에 파묻혀 발견되지 않은 이유가 이해가 간다.


차코벤은 예상과 달리 규모가 크지는 않고 몇 개의 피라미드를 제외하면 주거지도 다른 도시 시설들도 모두 파괴되어 가이드의 설명을 들어도 큰 감흥을 느끼기 어렵다. 옛 절터에서 돌바닥만 보면서 과거의 웅장했던 사찰의 모습을 상상으로만 떠올려야 하는 기분이다. 마야 유적은 멕시코 및 주변 국가에 널리 퍼져 있지만 제대로 보려면 역시 치첸이트사나 툴룸 같은 규모가 큰 곳을 찾아가야 하는 모양이다. 그래도 막상 피라미드 앞에 서 마야 유적지를 직접 보니 묘하게 감동스럽다. 사람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저마다 기념사진을 찍느라 정신이 없다. 나는 동영상이라도 찍고 싶은데 멕시코 정부에서 비디오 촬영은 유료로만 허가한다는 말에 쫄아서 휴대폰으로 5초만 찍고 얼른 숨겨야 했다. 게다가 단체로 오니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건 좋은데 감흥에 젖을 여유가 없다. 유적지의 무너진 돌무더기를 상상의 힘으로 쌓아 올려야 하는데 시간에 쫓기며 보아야 하니 아쉬운 마음이 영 가시지를 않는다.


§ 유적지의 우거진 나무 위로는 원숭이들이 이리저리 날아(?) 다닌다. 원숭이들이 나타날 때마다 관광객들은 카메라를 들고 쫓아다니느라 바쁘고, 가이드는 원숭이가 자기 일을 빼앗아 간다며 푸념 아닌 푸념을 한다. 어쨌든 나도 원숭이 촬영을 시도해 보았으나 보기 좋게 실패했다. 이쯤이면 관광객들에게 익숙해져서 포즈라도 취해줄 것 같은데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차코벤에서 주어진 시간은 길지가 않아서 두 개의 메인 피라미드와 무너진 피라미드를 둘러본 후 크루즈로 돌아와야 했다. 마야 유적지를 제대로 보려면 크루즈보다 직접 칸쿤 등으로 이동해 한 곳에서 오래 머무르며 보아야 하는 것 같다. 기대가 컸던 만큼 아쉬움이 적지 않으나 또 아는가, 언젠가 다시 멕시코를 올 일이 있을지. 은퇴나 해야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페루의 마추픽추도 5년 전 뜻하지 않게 가게 되었다. 다시 올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던 아메리카 대륙에 9개월째 살고 있고, 작지만 마야 유적도 보게 되었다. 살다보면 언젠가 생각지 못하게 아즈텍 유적이나 치첸이트사도 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으니 너무 아쉬워하지 않기로 했다.


Best things are yet to come


지금도 나를 향해 오고 있을 가장 좋은 날들을 기다리며, 오늘 제대로 보지 못한 마야의 유적들은 상상의 눈으로 그려 보기로 했다.


§ 아직 복구가 진행 중인 피라미드. 뒤편에 덧대 놓은 나무판자가 보인다. 저 무너진 피라미드 꼭대기만큼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다면 그 어떤 폐허에서도 궁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아침에 투어를 놓치고 - 놓쳤다기보다는 투어 가이드에게 버려졌다는 표현이 더 맞겠으나 - 분노했던 것을 떠올리면 유적지의 크기가 대수인가 싶기도 하다. 뒤늦게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 실망이든 분노든 부정적인 감정에는 유예를 두자고 다시금 마음 먹었지만, 살면서 그러기가 어디 쉽던가. 쑥쑥 자라나는 밀림의 나무처럼 부정적인 감정을 숨겨줄 근사한 가림막이 있으면 좋겠으나, 그렇다 해도 그 감정들은 재주 좋은 원숭이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불쑥불쑥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훌륭한 조련사처럼 이를 잘 다스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오늘은 튀어나온 원숭이를 붙잡지 못했지만 내일은 잘 다독여 돌려보내리라 다짐하며 차코벤을 떠나 크루즈가 기다리는 코스타 마야의 항구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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