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토록 무덥던 조지아에도 어느덧 가을이 찾아와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기분 좋은 선선한 공기가 느껴진다. 미국의 가을이 반가운 건 물론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핼러윈이 다가오기 때문이다. 기원이야 어찌 되었든 지금은 미국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즐기는 기념일인 만큼 가는 곳마다 핼러윈 소품과 행사 홍보가 가득하다. 나는 주말에 짬을 내어 이웃 제니퍼와 옥수수 미로 체험을 한 후 호박 밭에서 호박을 사 오기로 했다. 옥수수 미로는 주로 아이들이 많이 한다는데, 그래서 그런지 미로 외에도 트램펄린이나 조랑말 타기 등 아동용 놀이가 많이 준비되어 있었다. 옥수수 밭이 그렇게 커보이지 않아서 쉽게 생각했는데 웬걸, 막상 미로에 들어서니 옥수수들이 생각보다 키가 커서 방향을 잡기가 쉽지 않다. 미국에 옥수수 밭에서 길 잃고 헤매다 죽는 사람이 해마다 수도 없이 나오는 이유를 알 만도 하다. 길치에 방향치인 나는 내가 어디 있는지 조차 전혀 감이 오지 않는다. 나와 제니퍼는 길눈 밝은 남편 뒤만 졸졸 따라다닌 끝에 간신히 미로에서길을 잃고 헤매다 실종되는 사태를 막을 수 있었다.
§ 왼쪽은 옥수수 미로의 지도로 숫자 1부터 6까지의 장소를 모두 찾으면 미션 성공이다. 우리는 모든 숫자를 찾는 데 성공했으나 우습게도 출구를 못 찾아 입구로 나와야 했다. 옥수수 밭에는 옥수수들이 많이 매달려 있지만 사료용이라 따가도 먹을 수는 없을 거라고 한다.
미로를 나와 트랙터를 타고 농장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함께 간 이웃 제니퍼는 캔자스 출신인데, 캔자스에서는 핼러윈 분위기에 어울리게 귀신 분장을 한 사람들이 중간중간에 튀어나와 놀라게 한다고 한다. 마치 귀신의 집 처럼 으스스하면서도 재미있을 것 같은 이벤트이다. 우리는 농장을 둘러본 후 호박밭에서 호박을 하나씩 골랐다. 호박의 형태는 다양해서 각자 도안에 맞게 고르면 되는데, 나는 유령의 집을 만들 생각이라 길쭉한 호박을 고르고 남편은 박쥐를 만들 계획이라 동글납작한 호박을 집어 들었다.
§호박밭에서 간택을 기다리는 호박들과 완성된 호박 장식. 속을 파낸 후 뚜껑을 나중에 다시 덮는 줄 알았다면 꼭지 있는 것을 골랐을 텐데 형태만 보고 골랐더니 꼭지가 없어 허전하다.
집으로 돌아와 제니퍼의 지도편달 아래 본격적인 호박 조각을 시작했다. 우선 우리 제사상에 올리는 과일처럼 머리를 잘라내야 하는데 호박 껍질이 두꺼워서 칼날이 쉽게 들어가지 않는다. 힘을 주어 칼을 쑤셔 넣으며 유령의 집을 조각하겠다는 것은 너무 야무진 꿈이었나 하는 생각에 잠시 후회했다. 하지만 일단 머리를 잘라내고 속을 파내고 나자 조각은 의외로 어렵지 않았다. 해마다 이 시기만 되면 호박 조각이 성행(?)하는 만큼 조각용 칼들이 워낙좋고 형태도 다양해서 크게 힘을 들이지 않고도 도안에 따라 파낼 수 있다. 물론 나의 도안은 복잡해서 창문을 몇 개 부쉈지만, 본디 유령의 집이란 깨진 창문이 있는 법이라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다 만들어 놓고 나니 제법 그럴듯해서 대단한 작품이라도 만든 것처럼 괜스레 뿌듯했다.
§완성된 호박 안에 촛불을 밝히자 조각이 좀 더 선명하게 보인다. 호박에 조명과 리스를 더해 집 앞을 소박하게 꾸몄는데, 동네에는 오른쪽 사진처럼 진심을 다해 꾸민 집들도 많다. 이 집들은 한 달쯤 후에는 마찬가지로 진심을 다해 크리스마스 장식을 할 것이다.
호박 조각을 마치고 저녁이 되자 제니퍼네 집 뒤뜰에 모여 앉아 화롯불에 마시멜로를 녹여 스모어도 만들고 소시지를 구워 핫도그도 만들어 먹으며 시간을 보냈다. 쌀쌀한 가을밤, 일렁이는 화롯가에 앉아 달콤한 스모어를 우물거리며 쌉싸름한 맥주를 홀짝이니 천국 같은 행복감이 온몸에 퍼진다.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다 잠깐씩 대화가 멈출 때면 어디선가 귀뚜라미 소리가 울리며 적막을 깨뜨린다. 나는 스모어보다 달콤하고, 화롯불 보다 따듯한 우정과 환대를 베풀어 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감사함을 느끼며, 그들 덕분에 조금도 쓸쓸하지 않은 미국에서의 가을밤을 하루 더 보낼 수 있었다. 이제 곧 작별 인사를 고해야 할 미국의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도 별이 가득하다. 쉴 새 없이 깜빡이는 별을 향해 다정한 인사를 보낸 후 포근한 침실로 들어갔다.
§마시멜로는 불이 잘 붙기 때문에 꼬치를 돌려가며 잘 구워야 한다. 말랑해진 마시멜로를 초콜릿과 함께 비스킷 사이에 끼워 넣으면 달콤한 스모어 완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