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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ㅈㄷ Nov 22. 2021

둥근달, 기억 한 조각

여기, 올 가을 유난히 바람과 비가 잦다. 비바람 몰아치고 춥다는 핑계로 며칠째 창문을 꽁꽁 닫고 지냈더니 집안 공기가 쿰쿰한 것이 영 좋지 못하다. 오늘은 저녁에 고등어까지 구워 먹어 도무지 창을 열지 않으면 안 될 상황이었다. 다행히 오랜만에 날이 개였다. 땅은 오래 내린 비로 여전히 젖어있었지만 바람은 얌전히 불어 환기를 시키기에 적당했다. 오랜만에 블라인드를 올리고 창을 활짝 열었다. 창문 끝에는 둥근달이 걸려있었다.



네댓 살 즘 되었나. 아직 코 흘리던 어린 시절, 그날은 어쩌다 저녁시간에 엄마와 목욕탕을 다녀오게 되었다. 목욕을 마치고 나오자 늦가을 차가운 공기가 따뜻하게 데워져 있던 호빵 같은 내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찬 공기를 만난 따끈한 호빵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듯, 내 몸에서도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라가는 것 같았다. 내 눈길이 그 연기를 따라가자 목욕탕집 굴뚝이 보였고 그 기다란 굴뚝 너머로 커다란 보름달이 둥실 떠있었다. 목욕탕 굴뚝을 타고 올라가 손을 뻗으면 만질 수 있을 만큼 달은 가까이 내려와 있었다.

입 벌린 채 넋을 잃고 쳐다보다 엄마 손에 이끌리어 집으로 가는데, 달은 내가 걸음을 옮기자마자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목욕탕 굴뚝을 지나 나를 졸졸 따라왔다. 난 엄마 손에 몸을 맡긴 채 앞도 보지 않고 한껏 고개를 젖혀 보름달만 바라보고 걸었다.


"옴마, 달이 날 따라와."


식구 저녁 챙길 생각에 마음이 바빴을 엄마는 내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 나는, 길거리를 걸어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 나만 따라오는 달이 여간 신기하고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혹시 내가 멈추면 달도 멈추려나. 난 엄마에게 붙잡힌 손을 살짝 뿌리치고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정말 달도 멈춰 섰다. 다시 몇 걸음 걷자 달도 딱 고만큼만 움직였다. 분명 날 따라오고 있는 게 틀림없다. 엄마는 밤이 늦었다며 다시 내 손을 잡았다. 난 엄마에게 내 몸을 의탁한 채 다시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걸어갔다.


"옴마, 달이가 자꼬 따라온다."


그제야 내 중얼거림이 엄마 귀에 닿았나 보다.


"달이 가는 길이 우리하고 같은갑제."

"내가 서면 달도 서. 내가 가면 달도 가."

"그러게 와 자꼬 따라붙일꼬. 달이 니가 많이 좋은갑네."


엄마는 그렇게 달을, 나를 좋아해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밤하늘 길동무로 내 기억 속에 새겨놓으셨다. 가끔, 아니 자주 외로워 울적한 마음이 스며들 때면 고개를 들어 밤하늘에 뜬 달을 바라본다. 저 달은 여태 내가 좋아 이 먼 곳까지 날 따라와 주었구나. 나와 같은 길을 가는 달, 내가 좋아 날 자꼬만 따라다녔던 그 달이 오늘도 밤하늘에 둥실 떠있다. 그 달에 젊었던 엄마 얼굴이 비친다. 달이 날 따라왔듯 나도 달을 따라 걸어갈 수만 있다면 엄마 있는 곳까지 단숨에 닿을 텐데. 생각난 김에 홀로 사는 엄마에게 전화를 넣으려다 괜히 목이 매여 관둔다. 비에 젖은 가을 냄새가 바람을 타고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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