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한번 해볼까?
어릴 때부터 나는 글 쓰기를 좋아했다.
초등학생 시절, 특별활동을 신청하는 날,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학교를 못 간 적이 있었다. 그다음 주, 자리가 남아있는 반은 문예반뿐이었고-그 당시 아무도 가려하지 않는 반이었나 보다-한 학기 동안 나는 어쩔 수 없이 글쓰기 활동을 하게 되었다. 그게 본격적인 나의 '쓰기'의 시작이었다. 생각보다 나는 글 쓰기를 너무나 즐기고 있었고, 겉 멋이 잔뜩 들어서, 본인이 사용하면서도 무슨 말인지 정확히 모르는 어려운 어휘 정도는 써줘야 멋진 글이라 생각에, 난해한 단어만 나열하는 이상한 시를 써 대곤 했다.
한 번은, '시적 허용'이라는 게 너무 마음에 들었던지, 동시를 지으면서 '누나'라는 말을 써 본 적도 있었다. 같은 문예 활동하던 친구가 넌 여자아이인데 누나라고 하는 건 어디서 베껴온 게 맞다며 의심을 하였다. 어찌나 억울했었는지, 시에서는 다 괜찮다며, 그리고 이 부분에서는 언니보다는 누나가 더 잘 맞는다며 그 아이를 설득하느라 씩씩대던 기억이 난다. 동요 가사인 '우리 누나 손등을 간지러 주어라'에서의 '누나'라는 말이 마음에 들었고, 내 시에 쓴다면 너무도 멋질 것만 같았다. 운율을 생각하거나, 혹은 특별한 의미를 두고 사용한 단어는 솔직히 아니었다.
마흔이 넘은 아직까지도 기억나는 11살 때 만든 시 한 구절이 있는데, 내가 왜 그랬을까 싶을 만큼 부끄러워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조차 없는 구절도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뭐야"라는 말 밖에.
그 시의 제목은, '동면'이었다. 푸핫!
나는 보리고개를 겪은 할머니처럼, 물건을 자꾸 모아두는 성향이 있다. 조금이라도 내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어떻게든 정리하여 내 주변에 두고 싶어 한다.
우리 집 꼬맹이가 하루 종일 그림을 그리던 때가 있었다. 정말 말 그대로 아침에 눈을 뜨고 거실로 나오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그렸고, 밤에도 졸린 눈을 비비며 불을 끄지 못하게 하던 때가 많았었다. 사랑스러운 아이의 이 그림들은, 내 눈에는 정말 예술품이다, 어떤 것은 액자 속, 어떤 것은 파일 속에 각자 자리 잡아갔다.
나중엔 이 녀석이 그리는 양이 너무 많아지니까, 이쁘고 좋긴 한데 이걸 다 어떻게 가지고 있어야 하나 걱정이 되곤 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떤 이유에서인지 우리 집 꼬맹이는 갑자기 색연필을 내려놓았고, 내가 좋아하는 '아이다운 그림'은 거의 그리지 않았다.(요즘은 글씨를 쓰는 게 더 재밌어진 듯하다.)
그리고 그 일로 인해 그동안에 모아두었던 꼬맹이 그림들이 내게 더 소중한 존재로 다가왔고, 요즘은 가끔 보물 찾기를 하듯 액자에 넣을 게 없을까 예전에 그린 것들을 뒤적거리곤 한다.
꾸역꾸역 모아둔 또 하나의 것은, 지금도 우리 엄마가 가끔씩 들쳐보며 울고 웃는다는-우리 엄마는 좋은 일에 더 많이 우는데, 그 마음이 너무나 진심이어서 옆에 있던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너무 우실까 걱정이 앞서 아예 말을 못 하는 경우도 있다-내 초등시절 수년간의 일기장 모음이다.
처음에는 숙제로 시작했다가 그게 습관이 되어, 밀린 일기도 괜히 채워 넣는 이상한 의무감이 생겼고, 하루도 빠진 날이 없는 '초등 일지'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수년간의 일기장은, 기억에 한 10권 정도 되는, 예전 내가 초등학교다닐 적 사용하던 공책 묶음인데(요즘 아이들은 어떤 걸 쓰는지 모르겠다), 나는 한 권을 다 쓸 때마다 이를 잃어버릴까 봐 투명한 박스테이프로 서로를 붙여나갔고, 나중엔 그 부피가 너무 커져, 초록색 박스테이프까지 동원하여 엮고 붙이기를 하였다. 일기장이 뿔뿔이 헤어지는 일이 절대 없도록 만들어 둔 것은, 비록 볼품은 없겠지만 친정엄마가 걱정 없이 열어보며 울고 웃고 하기에는 아주 튼튼한 묶음 일 것이다.
내가 어렸던 그 시절의 누구나 그렇듯, 꿈이 뭐냐는 질문에 대한 나의 대답은 언제나 의사, 판사 혹은 과학자였다. 의사, 판사는 아마 주위 어른들의 세뇌도 한몫했을 것이다.
글 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도 막연하게 한 적이 있었다. 나는 지금 글을 '써야만' 하는 직업군에 종사하고 있기는 하다. 다만, 그 글이 내가 꿈꿨었던 그런 종류의 글은 아니다.
나에게는 수준 높은 어휘, 혹은 감탄을 자아내는 필력 따윈 없어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만 있지, 실천하기는 늘 어려웠다. 그래도 무언가 쓰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 건, '써야만' 하는 글이 아닌,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편히 쓸 수 있는 '나의 글 나의 말'이기 때문일 것이다.
밑줄 그어가며 기억하고 싶은 그런 구절은 아마 절대로 써내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이야기할 때마다 반짝이는 눈으로 들어주는 사람들도 있으니, 좀 미숙하지만 그들과 수다를 떨 듯 편안히 써내려 가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