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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이 스토리텔링 Feb 19. 2023

평범하고 아름다운 삶의 영웅들을 위하여

 아무도 읽지않을 흑수저 꼰대의 편지

태어나 반백년이 넘는 세월을 파도에 휩쓸리다 보니 요즘은 가끔씩 내가 지금 어디쯤에 서있나 하는 생각을 해보곤 한다. 난 나이 먹지 않고 늙지도 않을 줄 알았는데 미처 준비하지도 못한 채 어른이 되어버렸다. 글쎄, 인간의 삶이라는 게 준비할 수 있는 게 있기나 한 건지 잘 모르겠다. 그냥 여전히 내 앞에 남아있는 파도를 열심히 헤쳐나가고 있는 평범한 한 인간이라는 것과 그나마 다행인 건 세월이 준 보석 같은 선물로 이젠 감정의 굴곡이 이삼십 대처럼 그렇게 화려하지 않다는 거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겠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세대적으로 구분을 해보자면 난 이미 MZ세대들에겐 말조심을 해야 하는 꼰대고 어렸을 땐 우리 집이 가난한지도 모르고 살았지만 영락없는 흑수저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면 흑수저보다도 못한 똥수저 같은 가난을 겪으며 유년기를 보냈다. 어머니가 뒤뜰 조그만 텃밭에 심었던 옥수수를 따다 삶아주셨을 때의 그 달큼한 맛으로 배를 채웠고 말라비틀어져 빌빌거리는 체력으로 초등학교 운동회에선 맨날 꼴찌를 했다. 한쪽 가슴엔 어쩌다 자반고등어를 사다 구워주시며 한 번만이라도 꼴찌를 면해보라며 격려해 주시던 전쟁 세대인 부모님의 말씀이 아프게 새겨져 있고 다른 쪽 가슴은 컴퓨터의 OS가 DOS에서 Windows 3.1로 넘어갔을 때의 흥분을 기억하는 세대다. 지금은 없어져 버렸지만 그래픽전용으로 나왔던 코모더스의 아미가와 애플의 파워맥에서 돌아가는 게임을 짜릿해하며 지금의 MZ 세대만큼이나 전쟁 세대인 부모님의 세대가 구닥다리 꼰대로 느껴졌던 기억이 혼존하는 세대니 286, 386 아님 오십 대이니 586 아님 그냥 다 퉁쳐서 꼰대에 불과한 세대? 어쨌거나 그 중간쯤 어디일 것 같다. 대학을 갓 졸업하고 세상 속으로 뛰어든 아이가 안쓰럽기도 대견하기도 한 평범한 엄마이기도 하다. 가끔씩은 MZ세대인 아이와 또 직장에선 팀원들과 친구처럼 수다를 떨며 위로해 주고 위로도 받는 평범한 한 여자, 아내 아니 그냥 한 인간. 만사가 내 맘 같지 않아 모든 게 바닥을 쳤을 땐 나만 불행하다고 꺽꺽대며 질퍽거렸고 좀 잘 나간다 싶으면 내가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헤헤거리기도 했다. 


나이를 먹어서인지 아님 사는 환경 때문인지 쓰고 싶은 단어들이 깜박깜박 생각나지 않고 어떤 땐 일기장에 쓰는 문장마저 내 맘대로 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난해부터 사이버대학에서 문예창작 공부를 시작했다. 인터넷에서 뜨고 있는 핫한(?) 속어를 조사하고 그에 대한 의견을 제출하라는 숙제가 있었는데 사실은 숙제를 하다가 흑수저와 꼰대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한국이던 미국이던 미디어 매체가 떠들어대는 요란한 오지랖이 시끄럽고 피곤해 뉴스나 페이스 북 인스타 같은 블로그에 일부러 눈감고 살기도 했지만 미국에서의 삶은 워낙 개인주의적이라 다른 사람의 삶엔 별로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렇게 숙제를 하다 보니 블로그나 브런치에 올라오는 흑수저와 꼰대에 관한 글을 관심 있게 읽게 되었다. 그런데 꼰대의 특징은 이렇고 이렇게 길들이니 효과가 있다는 MZ세대의 글, 꼰대 소리 들을까 봐 어른으로 하고 싶은 말을 참는다는 꼰대 세대의 글, 흑수저 출신이라 한계를 느끼고 절망한다는 혹은 흑수저라 별 수없다는 글을 보면 참 씁쓸하고 슬프다는 것이다. 나이나 가진 거에 상관없이 모든 건 다 나와 다른 다양성에서 오는 것인데 이렇게 꼬리표까지 붙여가며 선을 그어야 할까. 가뜩이나 살기도 힘들어 죽겠는데. 미국에도 분명 세대 간의 갈등과 빈부 차이가 있는데도 왠지 낯설고 어색하며 상대방을 비하하는 듯한 말들이다. 다른 나라에는 없는 존대어가 있을 만큼 언어에서조차 예의를 지켰던 게 우리의 미덕 아니었던가. 아님 내가 살고 있는 이곳에도 나만 모르는 핫한 흑수저나 꼰대라는 속어가 있는 데 내가 무지한 걸까. 아무리 노력해도 허물 수 없는 지질하고 완고한 벽 같은 거, 선입견, 무의식적인 계층 간 분리? 아님 MZ세대들을 길러낸 우리 꼰대 세대들의 교육이 잘못됐나. 


꼰대의 과거는 한때 푸릇했던 젊음으로 이어져 있고 시간의 흐름은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것. 영원할 것 같은 젊음의 시간도 결국 뒤따라 오는 세대들에게 자리를 내줘야 하는 구닥다리 꼰대의 미래로 향해 있다. 꼰대도 MZ도 결국 내 과거고 미래인 셈이다. 사람의 근원은 원래부터 흑이었으니 따지고 보면 우리는 다 똑같은 흑수저다. 금수저니 은수저니 하는 말들은 우리의 욕심과 허영이 만들어 낸 비교라는 허망한 잣대일 뿐. 누구든 상황에 따라 금수저도 흑수저도 될 수 있고 때가 되면 꼰대가 되니 꼰대도 흑수저도 또 MZ도 어쩔 수 없이 누구나 겪게 되는 삶의 한 과정일 뿐이다. 심리학에는 자기 성취예언 (Self-fulfilling prophecy)이라는 게 있다고 한다. 사람의 운명은 자기가 이름 붙이고 생각한 방향대로 흘러간다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니 내게 또 너에게 주어진 어쩔 수 없는 이 삶의 과정을 흑수저니 꼰대니 하는 말로 경계를 그어가며 한계 짓지 말고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면서 연민을 가지고 토닥여주는 문화를 위해 노력하는 건 어떨까. 


세상의 모든 흑수저와 꼰대 그리고 MZ인 젊은이들 아니, 꼬리표 없는 평범하고 아름다운 모든 삶의 영웅들을 위하여…




이른봄 수선화와 크로커스가 피기 시작했습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아름답고 신비하여서 달리기 하다 말고 바닥에 주저앉아 그 모습을 셀폰에 담았습니다. 우리 모두 이렇게 아름답고 신비한 존재가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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