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pervisor : "안녕하세요, 오랜만에 부서에서 행사를 한다고 합니다. 11월 중으로 극장을 대관해서 같이 영화를 볼 거라고 하네요. 상세 일정은 추후 공지 예정이랍니다"
필자가 속한 파트의 리더께서 전체 공지를 하셨다. 부서원 전체 극장 대관 이벤트라고 하셨다. 코로나 이전만 하더라도, 부서원들을 데리고 극장 대관을 하는 이벤트가 종종 있었는데, 전염병이 휩쓸고 간 이후, 그런 행사는 잘 없었던 게 사실이라 반갑기도 하였으나,
극장을 가서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 자체가 이젠 나에게 크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듯했다. 아 물론, 보러 갈 영화가 어떤 것인지에 따라 분명 달라질 것이긴 하지만 말이다.
어느새부터인가 영화관에 가는 것도 나에게는 '노력'을 해야 하는 행위가 되어 버렸다.
생각해 보자, 영화관에 가는 시간, 가서 팝콘을 키오스크에서 주문 후 기다리는 시간, 좌석확인 후 들어가서 광고를 봐야 하는 시간, 실제 상영시간 등을 대략 합치면 3시간 정도는 걸리는 거 같은데, 나에게 '하루 3시간'이라는 개념은, 정말 엄청난 노력을 해야만 확보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 버린 거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상하게도 회사에서도 그렇게 바쁜 일은 없는데, 항성 무언가에 쫓기듯 생활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보니, '내가 저 정도의 시간을 할애할 정도로, 저 콘텐츠가 재밌을까?' 하는 투자대비 효율만 따지는 사람이 되어 버린 건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그래서, 요새는 보고 싶었던 영화도 유튜브에서 '영화리뷰 결말포함'을 친 후 가장 플레잉 타임이 긴 유튜브 영상을 클릭해 내가 보고 싶던 콘텐츠를 퀵하게 소비하고, 영상에서 말하고자 하는 내용의 정보를 대부분 그냥 내 머릿속에 넣어 버리고, '나도 이영화를 봤구나' 하며 스스로 만족감을 느끼며 시간을 소비할 때가 많다.
즉, 콘텐츠 소비를 안 하고픈 건 아닌데, '내 시간을 이렇게 들여서까지 콘텐츠를 소비하고 싶진 않다.' 는 게 현재의 내 모습이다.
드라마도 마찬가지다. 유튜브에 '일본 드라마 결말 포함' 등을 치면, 어렸을 적 내가 재밌게 봤던 일본드라마 명작들서부터, 최신 드라마들도 누군가가 아주 잘 '요약'해 두었다. 우리는 바야 프로 '요약의 시대'에 살고 있는 셈인 것이다.
다른 이야기 지만, 최근 둘러본 요약 본 중엔 일본드라마 'First Love'라는 드라마를 눈물 흘리면서 봤는데, 필자가 아주 좋아하는 같은 제목의 노래의 가사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들어진 드라마라고 한다. 관심 있으신 분은 한번 보셔도 좋을 거 같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며칠 전 팀 동료들과 점심 식사를 하는데, 그곳에서 나온 대홧거리중 하나가 '흑백 요리사'라는 프로그램에 대한 이야기였다.
"요새 재밌는 드라마나 방송은 뭐가 있을까요?"
"빛담님, 흑백요리사 꼭 보세요"
"과장님, 그거 재밌어요...?"
"네, 진짜 진짜 재밌어요. 전체를 다 봐야 요새 나오는 패러디나 밈을 이해할 수가 있어요"
그래, 내가 나름 트렌드 세터로서, 항상 스스로 시대에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 않은가? 음원 사이트 탑백도 꾸준히 듣고, 포털사이트 기사들도 잘 보면서, 사람들의 화젯거리의 반경 500m 정도의 근거리에 항상 들어와 있다고 생각을 하기에, 흑백요리사를 보기 위해 포털사이트에서 기본 회차 정보를 알아봤는데,
"세상에, 12회 차나 한다는 것이었다."
'아... 12회 차면 50분 곱하기 12면 얼마냐, 600분, 10시간이네...?'
열 시간이면, 나에겐 다른 많은 걸 할 수 있는 어마어마한 시간이었다. 사진을 찍으러 간다던지, 달리기를 여러 번 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고, 이렇게 책상에 앉아 브런치를 쓸 수도 있고, 보고 싶은 책을 볼 수도 있는 시간이었다. 나는 하릴없이 유튜브를 열었다.
(Typing) 흑백요리사 리뷰
이번 키워드에서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결말 포함' 등과 같이 요약본은 없는 듯했다. 하긴, 넷플릭스 예능인데 그런 식으로 요약 편집본이 웹상에 올라오는 게 더 이상하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못 보고... 아니 흑백요리사는 안 보고 지나갔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 내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그때 볼 수 있을까? 아마 아닐 거 같다. 그때가 되면 또 다른 콘텐츠가 치고 올라와 나의 시간을 소비해 가겠지.
흑백요리사라는 콘텐츠는 긴 시간이 흘러 유튜브에 '결말 포함' 본이 올라오지 않는 이상, 내가 전체 12회 차를 보지는 않을 거 같다는 생각이다.
그러면 어째서, 고등학생 때는 어떻게 그 긴 만화책들과 일본드라마를 계속해서 볼 수가 있었을까? 심지어 수능이라는 인생의 가장 큰 이벤트를 앞두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때는 그런 영상 콘텐츠가 너무 재밌어서 그랬을까? 그렇다면 반대로 지금은 앞서 이야기한 브런치 스토리 작성 등, 건전한(?) 콘텐츠들이, 예전에 좋아하던 영상 콘텐츠보다 더 낫다고 생각해서 그런 걸까.
글을 쓰다 보니 나의 지금 상황에 대해 정리가 된 부분은, 내가 어렸을 적 확실히 '콘텐츠 소비'를 좋아했던 거 같다. 음악도 그렇고, 드라마, 영화, 만화책, 심지어 비디오 게임까지. 소위 말하는 남들이 '재미있다'는 것들이 나도 재밌었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아직도 바람의 검심과 같은 장편 애니메이션을 밤새 보면서, 낮과 밤이 바뀌는 신기한 경험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어릴 때와 다르게 지금의 나는, 내가 만들어 가는 '콘텐츠 생산'에 더 흥미를 가지게 된 부분이 있는 거 같다.
지금 이 글을 작성하고 있는 플랫폼인 브런치 스토리도 그렇고, 평소 내가 찍는 사진을 자주 올리는 인스타 그램 및 사진 카페, 심지어 회사에서 조차 지금 생각해 보니 내가 시행착오를 겪었던 내용들을 잘 정리하는 '업무 매뉴얼'을 작성하는 것이 요새 즐겁더라 (정녕 내가 미쳤나 보다)
나이를 들어서 그런 걸까. 아닌데, 내 주변 동료들 보면 안 그런 사람들이 더 많은데.
아마도, 언젠가부터 문득 내 머릿속에 들어온 '시간의 소중함'이라는 개념이 이끄는 대로, 콘텐츠 소비에 대해 그다지 시간 투자를 안 해도 되게끔 마법을 부린 것은 아닐까? 이러다 정녕 '노잼 빛담'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어쩌겠는가. 지금의 내가 요약본 시청 이상의 콘텐츠 소비를 원치 않는다는데
언젠가, 다시 반대의 경우가 내게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때는 또 그때 가서 즐겁게 내 주변에 있는 콘텐츠들을 맘껏 만나볼 예정이다. 어렸을 적 내가 그랬듯,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말이다.
그래, 그때를 대비해서 지금 볼 필요는 없어. 그때 가서 날 잡고 명작 콘텐츠들을 왕창 몰아 보자고.
흑백요리사, 도깨비, 밴드오브 브라더스, 선재 업고 튀어, 가십걸 전체 시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