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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ed Jan 25. 2023

무계획이 계획이다

도파민 중독자가 사는 방법

 2022년 3월부터 8월까지 호주 멜버른에서 워킹 홀리데이를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그때 일어났던 모든 일, 느꼈던 모든 감정들을 한 발짝 떨어져서 기록하고 싶다. 내 인생에서 아마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직감이 들어서 일지도 모른다. 과거를 추억하는 행위가 의미 없다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것만으로 현재의 삶을 지탱할 수 있다면 괜찮지 않을까.      


 나는 무계획자가 되었다. 재수를 하던 시절에는 하루에 플래너를 3개나 썼다. 모든 게 내 계획 아래 흘러가야 하는 일종의 강박을 느꼈다. 휴학 이후에는 사람 자체의 성향이 바뀌었다. 어차피 모든 건 내 계획처럼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휴학 후의 나는 거의 충동이라는 마약에 중독된 것처럼 생각 없이 모든 것을 맞닥뜨리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 무계획의 극치가 워킹홀리데이였다. 물론 휴학하고 한 학기는 워홀을 해야지 하는 막연한 생각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듯 하고 싶다고는 하는데 실천할 생각은 없는 그런 종류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먼 나라 호주까지 가게 됐을까?     


 2022년 하면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 바로 보이스 피싱으로 70만 원을 잃은 것이다. 70만 원의 크기만큼 가슴이 뻥 뚫린 것 같아서 빨리 그만큼을 채워줘야 했다. 또 당시 한국을 향한 혐오가 극에 달한 상태였다. 보이스 피싱이 피상적 이유라면 당시 내가 놓인 상황에 느낀 염증이 주된 이유였다. 말했듯 당시 충동에 중독된 상황이었다. 한국에서는 뭘 해도 재미없고 뭔가 새로운 도파민이 필요했다. 워홀을 결심한 2월, 나는 바로 행동한다.     


 처음에는 캐나다 워킹홀리데이를 지원했다. 추운 걸 좋아하는 나에게는 딱 좋았다.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지만 당시에는 계절만 고려했다) 캐나다는 선발제이기 때문에 뽑히지 않으면 가지 못한다. 당연히 선발이 바로 되지는 않는데 성격이 급한 나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때 마침 장기간의 락다운을 끝낸 호주 정부가 워홀 비자를 무료로 발급해 준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민에 빠졌다. 워홀을 결심했을 때 호주만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었다. 초등학생 때 시드니에 간 적이 있다. 관광으로 가서 만족했지 살기는 싫었다. 덥고 쾌활한 건 질색이었다. 그래도 원래라면 50만 원 가까이를 지불해야 하는데 공짜라는 것이 좋은 조건 같았다. 무엇보다 내가 캐나다 선발을 기다릴 만큼 인내심이 있지 않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는 당장 호주 워홀을 신청한다.     


 호주는 역시 비자 발급이 빨랐다. 2월 18일 즈음 비자가 나왔다. 웃긴 건 비자가 나오고 17일 뒤인 3월 6일에 떠나는 비행기를 예약했다. 비자가 나오고서는 속전속결이었다. 속전속결이었던 이유는 내가 별로 계획하거나 실행한 게 없었기 때문이다. 처음으로 혼자 해외에 나가는 건데도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극한의 게으른 생활을 하고 있었다. 준비할 건 산더미인데 그냥 데드라인에 맞춰서 꾸역꾸역 실행했다. 호주에 가고 나서의 계획도 그냥 가이드라인만 있었지 사실상 없었다. 다만 출발 일주일 전 멜버른행 국내선 비행기 표를 샀다. 아무리 생각해도 시드니는 싫었다. 그러다가 찾아보니 문화와 예술이 발달했다는 멜버른이라는 도시를 알게 되었다. 날씨가 안 좋다는 것도 나의 선택에 한몫했다. 그렇게 출발 일주일 전 수많은 가능 세계 중 호주 중에서도 멜버른에 가는 가능 세계를 택했다.     


  과거에는 너무 고민만 하다가 하고 싶은 걸 놓치고 후회하는 날들이 정말 많았다. 워킹홀리데이를 계기로 생각하지 않고 행동부터 하는 사람이 된 것 같다. 한편으로는 결과론적으로 긍정적인 결과가 있었기 때문에 나의 무계획이 정당화되는 것 같다. 아무 계획 없이 워홀을 떠나면 높은 확률로 실패할 수 있다. 분명 워홀은 생각이 많을수록 진행하기 어려운 건 맞는 것 같지만 간단한 가이드라인 정도는 필요한 것 같다. (나처럼 위기를 은근히 즐기는 이상한 성향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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