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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테하라 Oct 16. 2023

민담 여행

위기의 원인을 알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내야 한다.

옛날에 여행하고 싶어 하는 아들을 둔 가난한 여인이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여행하고 싶어 하자 엄마는 우리는 돈이 없어서 여행을 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들은 자신 있게 말하며 ‘난 항상 많이도 말고, 조금만 이라고 말할’ 것이라며 여행을 나섰다. 아들은 즐거웠고 항상 ‘많이도 많고 조금만’이라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들은 어부들을 만났고 ‘많이도 말고 조금만’이라는 소년의 말을 듣고 그물을 건져보았을 때 물고기가 정말 조금만 있었다. 화가 난 어부는 아이를 막대기로 때렸다. 그러자 소년은 물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요?’ ‘많이 잡아라, 많이 잡아라.’ 소년은 사형 중인 형장에서 ‘많이 잡아라, 많이 잡아라.’라고 하다가 또 맞았다. 사형집행인에게 아이는 물었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요?’ ‘불쌍한 영혼을 거두소서.’ 소년은 백정이 말의 가죽을 벗기는 도랑에 당도했을 때 그는 ‘신이여, 저 불쌍한 영혼을 거두소서.’라고 말하다가 백정이 갈고리로 그의 귀 뒤를 때려 머리가 빙빙 돌아 눈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뭐라고 해야 하나요?’ ‘썩은 고기는 도랑에 넣어두세요.’라고 말하라고 했다. 그는 다시 길을 가다가 사람들이 가득 타고 있는 마차 곁을 지나게 되었다. 그는 ‘썩은 고기는 도랑 속에 넣어두세요.’라고 말했다가 화가 난 마부에게 채찍으로 맞게 되었다. 그는 마부에게 너무 심하게 맞아서 기어서 집으로 돌아갔고 일생동안 다시는 여행하지 않았다.   

   

별로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여서 줄거리를 요약했다. 아름답고 행복한 결말로 끝나야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졌지만, 이런 이야기는 잘 알려지지 않았다. 왜냐하면 무섭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며 설득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은 엄청난 능력이다. 그러나 주인공 아들은 ‘많이도 말고 조금만’이라는 말만 가지고 여행을 떠났다. 처음 시작이 가난한 여인으로 시작하다가 엄마로 나온다. 그리고 이야기의 중심은 아들과 만나는 사람과 사건과 말이다.

가난한 여인에게 아들이 하나 있었다. 아들은 여행을 하고 싶어서 안달이 났다고 했다. 어머니와의 관계는 낙관적이든 비관적이든 모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며 그것은 우리의 초기 인격발달에 조건 짓고, 인생에 대한 우리의 생과 우리 자신이 무엇이 될 건가에 크게 영향을 준다고 베델하임은 말했다. 어머니는 최초의 유일한 사람이며, 또 가장 기본적인 자아정의는 어머니와 관련하여 자신을 정의할 때 이루어진다. 

아들은 가난한 엄마가 돈이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여행을 갈 수 있느냐고 물었다. 가난한 여인이 엄마이기에 자식에게 아무것도 물려주지 못했다. 생각보다 그런 사람들은 세상을 참 긍정적이고 낙관적으로 본다. 가진 것이 없는데 스스로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고 엄마가 물려준 말, ‘많이도 말고 조금만.’이 말 하나만 들고 세상으로 나갔다. 세상은 가난하게 엄마와 살 때와는 다르다. 

‘조금만 기다려, 조금 있다가 줄게,’ 애정도 기대도 아이에게는 언제나 충족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그녀도 가난했기에 주고 싶어도 줄 게 없었을 것이다. 더 이상 젖을 주지 않는 엄마 곁을 떠나는 아이는 떠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의존할 수 없기에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한 엄마는 아이에게 의존하고 있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게 참, 나이가 드니 이해되는 게 많아지는 게 좋은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살아보니 그렇다. 그리고 아이가 행하는 어떤 것들이 그 아이의 눈높이보다 엄마의 눈높이로 쳐다보고 남과 비교하다 보니 ‘별로’, ‘좀’. 그래서 아이는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기 위해 여행하기로 했다. 

인생에서 커다란 사건은 출생과 집을 떠나는 것과 자신의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집을 떠나는 것은 기존의 방식을 버리고 새로운 삶의 방식을 터득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궁에서 벗어나 혼자서 호흡해야 하는 것, 언제나 도움을 받기만 하던 아이가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것, 또 자신만의 왕궁을 가지는 것. 자궁에서 나올 때도 엄마와 호흡을 맞추어야 하고 집이라는 자궁을 벗어나려고 할 때 부모는 아이가 혼자서 호흡해야 하지만 도와줄 수 있어야 한다. 아직은 집을 떠날 시기가 아님에도 아이가 여행을 떠나려고 했을 때, 온갖 고통스러운 경험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어 아들이 자발적으로 여행을 간다고 했을 때, 가난한 엄마는 걱정부터 했다. 유산은 물질이 아니다. 그것은 문화이고 정신이고 경험이다. 경험도, 정신도 조금만 주었고, 아이의 창의성은 ‘별로’라고 했다면, 그 아이는 새로운 경험, 자발적 여행은 시작부터 좌절을 맛보게 된다.

첫 번째로 만난 집단은 어부들이다. 그들은 바다에서 물고기를 잡아서 생계를 영위하는 사람들이다. 변덕스러운 날씨(자연적)와 언제 변할지 모르는 물(환경)에서 사는 그들은 성미가 급하고 비범하지만 까다롭고 예민하다. 소년의 중얼거림을 알아들을 수 있는 자들이다. 그들은 아이의 ‘조금만’이라는 말에 이상해서 자신의 그물을 걷어보니 물고기가 조금만 있었다. 그것이 소년의 탓이 아닌데도 그들은 소년을 막대기로 때렸다. 나쁜 사람들! 창의성은 물처럼 형체가 없다. 잠재적 에너지와 가능성이 풍부할 뿐 바다에서 명료함이란 물고기라는 펄떡거리는 생각이다. 

나의 아들인 소년은 어부들에게 물었다. 그럼 뭐라고 해요? 배움이란 내가 모르는 것, 생각하지 못했던 것,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아들은 그것을 배우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가난한 엄마의 아들인 것을.

이 작은 소년은 그래도 여행을 계속했다. 두 번째로 만난 곳은 사형이 집행되는 장소였다. 그곳은 공동체 사회에서 잘못을 했을 때 최고의 형인 사형을 받는 곳인데 아들은 ‘많이 잡으세요.’라고 말한다. 아, 어쩌면 좋은가? 초자아를 잘못 형성한 사람들이 많아지면 안 되지 않는가. 아들은 이곳에서도 매를 맞는다. 그의 초자아 역시 상처를 입었다. 아들은 물었다. ‘그럼 뭐라고 해요.’ 어부들에게도 물었던 질문이다. ‘그럼 뭐라고 해요.’ 어부는 '많이 잡으라'라고 했고, 사형집행인은 ‘불쌍한 영혼을 거두소서’라고 말하라고 했다. 

이번에는 백정을 만났다. 그는 짐승을 잡아 도랑에 넣고 가죽을 벗기는 중이었다. 짐승 같은 사람들, 동물처럼 사는 사람들은 감정의 구렁텅이에 있는 것과 같다. 개와 같이 있으면 벼룩과 함께 깨어난다고, 사람도 그렇다. 감정이 억압당하면 사람은 냉담해진다. 소년의 ‘불쌍한 영혼을 거두소서’의 말에 백정은 멍청하다고 하면서 아들의 머리를 갈고리로 때렸다. 귀와 눈이 있는 머리, 물론 코도 있지만, 머리는 인간의 머리는 모든 감각을 관장하는 곳으로 특히 눈과 귀는 인지하여 판단할 수 있는 곳이다. 머리는 미래의 행동과 지금의 욕구 충족을 미룰 수 있는 인간만이 가진 귀중한 장소이다. 백정은 그곳을 갈고리로 때렸다. ‘그럼 뭐라고 해요.’ ‘썩은 고기는 도랑 속에 놓아두세요.’라고 백정은 말했다. 

소년은 또 길을 떠났다. 이번에는 사람들이 가득한 마차 곁을 지나게 되면서 소년은 ‘썩은 고기는 도랑에 넣어두세요.’라고 말했다. 마차는 도랑 속에 빠지고 말았고 마부는 채찍으로 소년을 흠씬 때려 기어서 엄마 곁으로 가 다시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다. 마차는 이곳과 저곳을 이동시키는 도구이다. 마부는 그것의 실행자이다. 당연히 아이는 다른 곳으로 가지 못했다. 자기만의 세계를 발견하지 못했다.

소년에 주변 환경을 탐색하며 전진할 때, 모두가 소년을 교육하려는 사람들뿐이다. 막대기, 갈고리, 채찍은 동물들에게 쓰는 징벌 도구이다, 징벌은 소년의 모든 미래를 망치고 말았다. 그들은 소년의 지적탐구와 정서적 발달과 사회적 행동과 의사소통을 모두 말살시켰다. 아들에게 자신들의 사고를 강압적으로 주입하려고 했을 때 아이는 자신만의 사고를 가지지 못한다. 그들의 사회가 요구하는 방식으로 수정하라고 강요하는 어른들만 있었다. 아이의 내적인 가능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아들이 하던 말들이 상황과 맞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 아이의 말을 다른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했을 뿐이다. 물고기는 조금만 잡아야 하고 나쁜 짓을 한 사람은 많이 잡아야 하고, 감정이 없는 사람의 영혼은 신께서 돌봐주어야 한다. 소년이 도랑에 빠진 사람에 대한 감정은 다른 사람들의 불행을 보고 아무런 느낌을 가지지 못하게 된 것뿐이다. 소통하고 배우려는 소년의 간절함은 이렇게 파괴되었다.

가난한 여자가 가진 창의성, 도덕성, 충동적인 행동의 저지는 편협하고 부족하다. 정신적 유연성을 갖지 못하였다. 그래서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 계속 배우려고 묻지만, 그들 역시 자신들이 가진 것 말고는 다른 것을 알려주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사고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못해서 소년의 성장은 멈추고 다시 엄마에게 돌아갔다.  

보통 성장하려는 아이가 길을 나서면 조력자나 마법의 도구들이 나타나는데 여기서는 조력자도 마법의 도구도 없다. 너무나 현실적이어서 ‘옛날에’는 언제나 우리를 과거의 어떤 장소로 데리고 가서 그곳이 나의 문제를 보게 한다. 이 이야기가 나를 과거에 있었던 어떤 일 때문에 현실을 힘겹게 하는지를 알려준다. 진정한 자율성은 인격의 발전이 우선되어야 하고 너무 오랫동안 사고의 의존성을 가지고 있으면 다음 발전이 힘들다. ‘그럼 어떻게 해요.’라고 질문하고 사고하여야 한다. 자신이 판단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사고에 계속 의존하면 파멸이다. 

위기의 원인은 현재의 삶이 방식에서 중요한 것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지금까지는 우리는 기본의 방식을 고집하여 여기까지 살아왔는데 어느 순간 위기가 왔다면 새로운 방법을 찾아야 하는 절박한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 자라지 못한 소년처럼 자신만이 세상에서 나오지 않는다.

세상은 공평하지 않고, 공정하지 않고, 정의롭지 않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서 여기까지 왔다. 대단하다고. 가난한 엄마의 편협한 사고를 가지고도 살아남았으니, 살아있으니 ‘조금만’ 더 힘내보자. 역시 나도 가난한 엄마인가 보다. ‘조금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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